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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人] 강학천 수원화교중정소학교 교장

중국국적 가진 강학천 교장의‘수원민국 수원사람’ 이야기
수원화교중정소학교 초·중·고 국제학교로 키우고 싶다
학력인정 위해 한국국어, 한국사회 과목개설 시험중


글ㅣ안병현 편집장 abh@kgnews.co.kr 사진ㅣ최우창 기자 smicer@kgnews.co.kr

 

 

흔히들 중국인들을 화교(華僑)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외국에 거주한 역사는 수천년에 이르지만 정식으로 화교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약 100여년전인 청나라 말기부터이다. 1909년의 청나라 헌법과 1929년의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고 부른다’ 라고 되어 있다. 정확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며 모든 단체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화교들이 서울과 인천을 근거지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1998년 660㎡ 이하로 소유를 제한했던 외국인 부동산 관련 법규가 풀리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화교는 활동폭을 넓혀갔다. 중국의 부상과 21세기 지구촌 시대 도래, 특히 1997년 IMF사태 이후 외국 자본 유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한국 화교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딛고 올라섰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서서히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역시 한국 화교의 재도약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교교육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모든 화교는 화교학교 입학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전국에 화교학교가 20여개교 운영중이다. 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수원화교중정소학교 강학천(姜學泉) 교장을 만나 자세한 내용을 들어봤다.

수원이 고향인 필자는 어린시절 어렴풋한 기억으로 수원역 근처에 화교학교가 있을 것이라는 기억을 되새기며 찾아갔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 172번지 수원화교학교는 그곳에 있었다.

강학천 교장이 운동장으로 나와 반긴다. 3평 남짓한 교장실은 그냥 초라한 집무실 그 자체였다. 수원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화교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갔다.

- 강 교장선생님 국적이 대만으로 되어 있는 것은 부모님 국적을 따르도록 한 것인가요.

“저는 수원태생입니다. 부모님 두분은 모두 중국에서 건너오셔서 한국에서 만나 결혼하셨고 아버님 성함은 강여천(80세) 어머님은 왕소운(작고)입니다. 6.25 전쟁후에 호적을 정리 할때 당시 한중수교 국가가 중국 대만이라서 한국내 거주 중국인들은 모두가 대만국적을 취득하게 되었고 2세 3세들도 그대로 국적이 승계된 겁니다. 다만 2010년 11월 이후 한국 국적법 중 이중국적법이 통과되어 배우자 중 한쪽이 한국인인 경우에는 1998년 8월 16일 이후에 태어난 자녀는 한국국적을 자동으로 취득하게 됩니다.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는 한국사람이어서 2010년 4월에 태어난 제 손녀딸은 이제는 한국국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자식에게 혼란스런 국적 대물림 옳지 않아

- 그게 다행스러운 일인가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의원을 개업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중국놈, 짱개 하면서 놀리는 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1986년 12월 30일로 기억됩니다. 결혼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대만에 관광을 갔는데 입국심사를 받을때나 호텔, 상가에서 거의 모두가 우리를 한국사람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그 이듬해 처 자식과 함께 미국에 있는 여동생 결혼식에 갔는데 입국심사장이나 관광지 호텔 등에서도 한국인 대우를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 하는 말이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왜 대만 여권을 가지고 있느냐. 너희들은 한국사람이다” 이런 논리입니다. 여행후 한국에 들어오는 입국심사때는 또 다시 중국 사람이라고 한국출입국 심문을 받는 겁니다. 이런 혼란스런 국적을 자식들에게 까지 물려주는 것은 그다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 학교를 졸업하셨으니 기억이 새록새록 하시겠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5월 5일 어린이날은 공휴일이라서 학교에 등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책가방 들고 등교를 하는데 동네 친구들이 공휴일인 어린이 날에 왜 가방들고 학교 가느냐고 묻는 거에요. 어린 마음에 당황해서 “우리 중국학교는 4월 4일이 어린이날 이다(대만, 홍콩은 지금도 4월 4일이 어린이날)” 라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한 적이 있어요. 그 후 제가 교장에 부임하면서 대만 공휴일은 정상수업을 하고 한국 법정 공휴일에는 저희 학교에서도 수업이 없습니다. 한국실정에 맞게 학칙을 개정했습니다”

일제치하 시절 수원서 서울 명동까지 통학

수원화교중정소학교는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화차를 타고 수원에서 서울에 있는 소학교까지 이어지는 통학로는 이만저만한 여정이 아니었다. 일제치하인 1946년 17명의 수원소재 화교학생들이 서울 명동화교학교까지 통학을 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학생들을 태운 화차에서 그만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다. 수원에서 출발한 학부모들은 천신만고 끝에 아이들을 데리고 무사히 수원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화교가 수원 종로에 운영하고 있던 음식점 2층을 교실로 제공한 것이다. 이렇게 수원화교학교의 역사는 시작됐다. 사정이 어렵게 되자 매산초등학교 인근 절에서 교육을 하다가 6.25이후 부산으로 이전했다가 6.25 전쟁이 끝나자 마자 현재의 자리에 둥지를 틀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화교의 번성기가 있었다. 한 때 화교가 많을 때는 전국에 5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1만5천명으로 줄었다. 수원에만 300여명 정도의 화교가 살고 있다. 수원화교학교는 크게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사회적 문제는 외국인토지취득의 금지이다. 외국인은 165㎡(50평) 이상의 토지는 소유를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원화교학교도 공동등기 형식으로 학교를 유지해 올 수 밖에 없었다. 1998년 IMF와 함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국인 투자의 필요성이 중대되면서 외국인에 대한 각종 규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기 시작했다. 외국인 토지취득도 660㎡(200평)로 완화되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화교학교의 공통사항이기는 하지만 교육당국으로부터 정식학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화교학교를 담당하는 주무관청이 정권이 바뀔때마다 오락가락해 왔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노태우 정부때는 문화관광부, 김영삼 정부때는 법무부, 김대중 정부때는 교육부, 현재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관장하고 있다.

관할 당국으로부터 정식학교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겪어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학교교사가 너무 낡아 증개축의 필요성이 벌써 수년전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도 자재품귀 현상이 극심하던 50년대 중반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 대만 대사관 무관이 미8군에 요청해 미8군의 도움을 얻어 지어진 것들이다. 50년이 넘은 학교 교사를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수원화교학교의 현실이 위태롭기만 하다.

 

 

강학천 교장은 2004년 이사회의 추천을 받아 현재까지 교장으로 재직중이다.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수원화교학교 선배가 찾아와 엔화가 가득 든 돈봉투를 건네주고 갔다며 필자에게 보여준다. 한화로 환산하면 4천만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화교학교, 학교로서 최소한의 지위도 못 누려

화교학교는 말이 학교지 학교로서의 최소한의 지위도 갖지 못한채 위태롭게 버텨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면서 수원화교학교도 존폐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2006년 관계기관의 무관심으로 학생수가 30명으로 줄어드는 위기를 맞았다. 불법학교로 낙인이 찍힌 후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화교학교 바로 인근에 행정당국이 여관허가를 내주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현행법상 화교학교는 각종 학교에 해당한다. 대안학교, 외국인학교와 함께 각종학교로 분류돼 각종 지원을 받을 수가 없다.

강 교장이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정식 인가학교의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경기도교육청으로부 학력인정의 전제조건으로 교육과정에 한국어와 한국사회 과목의 개설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강 교장은 다음 학기부터 전국 화교학교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어와 한국사회 과목을 신설할 것을 약속했다. 지난해에 청주, 천안 화교학교가 폐교 되는 등 존폐위기에 처한 것을 감안하면 강 교장의 결정은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관계당국으로부터 정식학교로 인정을 받으면 한국학생들이 화교학교를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 또 오래된 학교교사를 개축할 수 있는 지원이 뒤따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부족한 교재를 확보할 수 있어 가슴 부풀어 있다.

수원화교중정소학교 전교생은 95명이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학생수는 줄어든다. 한국학생이 한국학교로 전학을 가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 진학할 수 있는 화교중학교는 서울과 인천에 있기 때문에 일부는 이들 학교로 입학하고 일부는 수원 관내에 있는 중학교에 검정고시를 치르고 입학을 한다. 학력인정을 받지 못해서이다. 현재 한국학생의 비율은 50%정도지만 내국인 학생이 갈수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대만대사관 철수 이후 화교조직 지원 끊긴 상태

화교조직은 대만출신 인사들의 집합체다. 그러나 행정적인 것들은 중국대사관에서 지원하고 있다. 한국과의 국교단절로 대만대사관이 철수한 이후 지원은 끊긴 상태다. 수원화교학교에서 화교들의 행정업무도 보고 있다. 수원화교협회는 안양, 안산, 오산, 여주, 이천, 의왕, 성남 등 6개시군에 산재해 있는 1000명 화교들의 행정업무를 지원하는 일도 하고 있다.

- 중국의 급부상과 글로벌 경쟁체제에서 중국의 비중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화교학교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저는 화교학교를 화교학생 위주의 중국교육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특수한 상황에서 중국교육을 시행하는 한국학교라고 새롭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글로벌 시대 세계적인 인재를 육성하는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화교소학교에서는 중국어만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3학년쯤 지나면 중국어, 한국어는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고 영어를 공부한다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3개 국어는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봅니다”

- 어찌보면 화교가 우리나라가 최근 겪고 있는 다문화의 시초이자 상징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다문화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화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맞습니다. 한국에 장기 거류하고 있는 외국인으로는 아마도 화교들이 예전에는 90%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수립이후에 여러가지 정치 행정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제약과 불평등한 규약 때문에 우리 화교 1세 어른신들이 그 당시 가지고 있는 생각은 남의 나라에 와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고국(중국 대륙)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지냈습니다.

다문화사회는 필연 동등한 대우 받아야

냉전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세계화 시대의 중심에 한국이라는 국가 축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지에 도달하면서 점점 단일 민족국가에서 다민족 국가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수원시만해도 인구 총수는 110만명인데 그중에 외국인은 3만명입니다.

다문화 사회는 이제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우리화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정부에 순응하면서 우리 2세 3세 4세를 거쳐 한국에 살면서 똑같은 국민으로 취급받는것이 소원입니다. 주민등록증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화교들은 이 땅에서 성실하고 근면하며 또한 한국을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같은 국민 대우를 받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 수원에서 중화한의원을 개원하고 활동중이신데요, 한의학을 전공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때 어머님께서 뇌졸중으로 당시 서울의 병원에 2달간 입원 치료했는데도 언어장애와 반신마비가 호전이 안돼 한의원에서 한방치료하고 1년 6개월만에 완치되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때 아버님의 대학 진학 상담이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두가지 안을 제시 하였습니다. 나중에 대만에 가서 대학을 다닐 경우에는 토목공학을 전공했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면 중학교 졸업후 우리가족 모두 대만으로 이민간다. 만약에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면 한의학을 전공 했으면 좋겠다. 일주일 후에 답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고민 끝에 한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어머님의 중풍치료가 한의학적 치료로 완쾌된 것. 또 하나는 내가 한국에서 태어 나 한국에서 자랐는데 친구들이 있는 한국에 남아야지 하고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에 아버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광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5월6일에 약관 24세때 개원했으니 지금 같으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기록입니다”

고민과 갈등 끝 ‘나는 수원민국 수원사람이다’

- 국적이 중국인데 ‘수원사람’ 임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나요.

“당연이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 졸업하고 한의원 개원초기 만해도 저는 스스로도 나는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얘기하고 그렇게 살았고 한국사람들도 중국사람이라고 칭해주고 동네 죽마고우들도 저를 중국사람으로 이해해 줬습니다. 그 후로 고민과 갈등을 겪으면서 내린 결론은 나는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그래 나는 ‘수원민국 수원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국외에 있는 친지 친구들에게도 수원 홍보를 많이합니다. 수원을 너무 사랑합니다. 고 심재덕 수원시장을 만났을 당시 수원천 복개를 반대했던 심 시장과 많은 대화를 나눈적도 있습니다”

강 교장은 요즘 바쁘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틈나는 대로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중화한의원에서 환자 진료를 위해 시간을 쪼개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들 서원(30)씨가 대구한의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대를 잇기 때문이다. 강 교장이 좀더 사회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아들이 마련해 주고 있는 셈이다.

강 교장은 매월 셋째주 일요일이 기다려진다. 2007년부터 리컴번트 바이크 클럽 벤트라이더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부터다. ‘누워서 타는 자전거’라는 이름이 붙여진 리컴번트 바이크는 최고시속이 60㎞에 도달할 정도로 속도감을 즐기는 자전거로 유명하다. 부부가 함께 즐기는 리컴번트 바이크의 세계에 매료되어 있는 강 교장이 얼마나 진취적이고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의 꿈을 물었다. “교장일은 순수한 봉사입니다. 행복감을 느낍니다. 저의 소박한 꿈이 있다면 수원화교중정소학교를 초·중·고교 모든 교육과정을 아우루는 국제학교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강학천 교장은

△1957년 수원출생

△1969년 수원화교중정소학교 졸업

△1974년 인천화교 중산중고등학교 졸업

△1980년 원광대학교 한의학과 졸업

△1980년 수원에서 중화한의원 개원

△1993년~97년 수원시 한의사회 회장 역임

△1996년~98년 경기도한의사회 수석부회장 역임

△1996년~현재 수원경실련 집행위원

△2004년~현재 수원화교중정소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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