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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을까?

 

■ 수원화성박물관,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행사

정조가 정약용을 처음 만난 건 1783년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들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처음 정약용을 본 정조는 “얼굴을 들라. 몇 살인고?”하고 물었다. 생원시에 합격한 미관의 청년에게 용안을 보여준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 정약용이 “임오생이옵니다”라고 대답한다. 임오년은 1762년으로 바로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해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이한 뒤 20여 일 후에 태어났다. 정조와 정약용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한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비운의 왕세자’라고 불리는 사도세자 ‘이선’. 그가 올 해 서거 250주기를 맞이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를 맞이해 다양한 추모행사를 연다. 사도세자의 생애와 현창사업을 재조명하는 기획전시 및 학술대회 등을 비롯해 사도세자를 단일 주제로 한 다양한 연계 추모행사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잘못 알려져 있던 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특별기획전과 학술대회를 통해 밝혀진다.

 

박물관대학을 통해 사도세자를 바로 알고 특별기획전을 통해 사도세자 관련 유물을 감상하며, 학술대회를 통해 사도세자에 관한 학계의 주요 쟁점들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자.

 


▲사도세자 추모 행사

수원화성박물관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를 맞이해 ‘사도세자’ 단일 주제로는 전국 최초의 기획전시와 학술대회 그리고 박물관대학 등 연속 프로그램을 기획, 사도세자에 관한 관심도 제고 및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를 조성한다.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일생과 그의 사후 조선 왕실의 현창사업에 관한 내용을 8개의 주제로 구성, 각 주제별 전문가의 강좌를 통해 사도세자의 실체를 바로 알고 조선후기 왕실과 권력에 대한 이해한다.

강의시간은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이며 일반 시민 7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수강료는 2만원이고 박물관 홈페이지(http://hsmuseum.suwon.go.kr) 및 방문해 접수할 수 있고 기타 자세한 사항은 전화(031-228-4219)로 확인할 수 있다.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영조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되어 장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사도세자의 탄생에서부터 죽음 그리고 조선 왕실의 추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주요 내용으로 추모 특별전이 열린다.

특히, 사도세자 원찰인 용주사에 정조가 헌납한 유물 및 혜경궁홍씨 집안인 풍산홍씨家 소장의 유물을 비롯, 사도세자 친필 등 약 80여 점의 유물들이 국내 최초로 한 자리에 모인다.

전시는 6월 1일부터 7월 1일까지 수원화성박물관과 화성 용주사효행박물관에서 열린다.
 

 

 

 


▲학술대회

사도세자의 생애와 추숭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주요 쟁점이 되는 주제를 선별, 학자 간의 이견과 논쟁을 통해 사도세자의 활동과 현창사업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한다.

오는 7월 12일 정병설(서울대 국문과 교수) 발표자 등 4명이 ▲역사 사료로서의 ‘한중록’의 가치 ▲임오화변에 대한 각 정파의 입장과 추이 ▲무예서 편찬과 북벌의지 ▲조선왕실의 사도세자 현창사업 등을 발표한다.

▲기타 타 지역 추모 행사

세계문화유산 융릉봉향회 주관, 융릉 제향 : 4월 7일 오전 11시

(문의 : 031-238-8599, 이정우 회장 010-2572-2349)

경북 예천군 주관, 사도세자 태실 터 발굴조사 : 4월중

(문의 : 예천군 학예연구사 이재완 010-4745-7454)

용주사 주관, 사도세자 250주기 기신제 : 7. 10 ~ 7. 11

(문의 : 용주사 종무소 031-234-0040)

 

 

 

사도세자(1735~1762)

영조의 둘째 왕자. 이름은 선.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영빈이씨(瑛嬪李氏)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됨)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 때 혼인해 곧 별궁에 거처했다. 그는 나면서부터 매우 영특했다.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떼었다. 또한,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영특한 그는 10세 때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세력인 노론들이 처결한 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 숙의문씨(淑儀文氏)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했다.

성격이 과격한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그는 격간도동(膈間挑動)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한 나라의 서정을 맡고서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그 병의 증상에 대해 그의 장인인 홍봉한은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無可指之形 非病而病 作歇無常)”고 했다. 1761년에 계비 김씨의 아비인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했다. 영조는 대로해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다. 그가 죽은 뒤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神主)에 제주(題主)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되고, 1899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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