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칼날은 있다
노인의 목을 베고 있는
세월의 칼날
단번에 휘두르지는 않지만
칼날을 거둔 적이 없다
서서히 깊어지고 있지만
결코 피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참수
존재에 대한 집착이 어느 날
동백꽃처럼 한 번에 싹둑
잘려 나갈 것이다
-실천시선 / 하상만 시집 ‘간장’ /실천문학사
인간의 최후는 모두 참수형이다.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건만 세월의 칼날이 우리의 목을 서서히 베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다. 참수하는 순간의 끔찍한 고통, 그 고통이 긴 시간 서서히 분산되도록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목을 베는 세월이라는 집행관의 솜씨는 실로 대단하다. 어쩌면 칼이 지나간 흔적을 주름으로 슬쩍슬쩍 보여줌으로써 존재의 유한함을 각성시키는지도 모른다.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도 세월 앞에 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참수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인가? ‘동백꽃처럼 한 번에 싹둑 잘려나갈’ 허무한 존재, 인간은 그래서 슬픈 동물이다. /성향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