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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의왕 ‘왕림마을’ 설화

 

 

 

 

의왕시와 의왕문화원의 문화원형은 테마가 있는 마을 ‘왕림마을’을 배경으로 한 설화를 중심의 문화원형이다. 의왕의 지리적인 위치나 역사적으로 독립된 도시로 성장된 곳이 아니라 예로부터 광주군, 수원군 등의 변방의 부속도시로 성장되다 보니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유산 등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건속에서 ‘왕림마을’이라는 곳은 조선시대 3대정승을 배출한 청풍 김씨 집성촌이라는 특징과 조선시대 8대명당이라는 안동권씨 묘역과 화성행궁 축조 당시의 가마터가 발견되는 등 역사가 있는 마을로 테마별 역사코스 조성 및 해설과 민속체험을 함께 할 수 있는 마을로 조성되고 있다.
 

 

 

 

 

 

 

 

 


▲왕림(旺臨)

고천지구대 옆 옥개도로을 따라 동쪽으로 백운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조 연산군때 정주목사를 역임하고 청평군에 책봉된 김우증(金友曾)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동쪽으로는 백운산(白雲山), 서쪽으로는 오봉산(五峯山), 남쪽으로는 지지대(遲遲臺), 북쪽으로는 모락산에 이르기까지 사방십리를 사패지로 받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면서 취락이 형성됐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그 이름이 높던 정조대왕이 수원의 융릉(사도세자의 묘소)을 참배하고 환궁하는 길에 이곳에 친림(親臨)했다고 해 ‘왕림(旺臨)’이라 했다.

그런데 본래는 왕림(王臨)이라고 해야 옳으나 사가(私家)에서는 임금 ‘왕'王)’자를 사용할 수가 없어 임금 왕(王)자 앞에 날 ‘일(日)’자를 썼다.

왕림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마을 위 동쪽지역은 청풍김씨의 사당이 있으므로 ‘별묘(別廟)’ 또는 ‘웃말’이라 부르고, 마을회관 주변은 ‘향촌’ 또는 ‘아랫마을’이라 불렸다.

별묘아래는 향촌과 별묘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샌말(間村)’이라 칭하고, 서남쪽지역은 김치후의 묘가 능처럼 크므로 ‘새능말’이라 불리우며, 남쪽지역은 그늘진 곳에 있는 마을이므로 ‘응단말(陰堂村)’이라고 부른다.

마을 초입은 풍수로 보아 기러기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낙안동(落雁洞)’ 이라고 부른다.

또 계묘병원 앞 개울건너(남쪽)에 있는 마을은 ‘죽동(竹洞)’, 별묘 남쪽은 ‘방까시’, 아랫말 남쪽은 ‘서당현(書堂峴)’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통미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서 백운산 아래에 있는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의왕문화원의 추진목적

묘역과 배출된 인물에 대한 설화를 스토리텔링하여 홍보함으로써 외부관광객 유도 및 지역을 브랜드화 시키고, 풍수지리에 관한 학술 토론회 등을 통해 의왕을 살기 좋은 도시로 홍보함으로써 의왕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기획됐다.

마을과 관련된 다양한 설화를 스토리텔링함으로써 시민과 학생들에게 지역의 역사에 접근하기 쉽고 지역에 대한 정체성을 갖게해 의왕시민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추진됐다.

▲추진상황

‘안동 권씨 묘’는 오봉산 밑에 있는 안동권 씨 묘역은 후손들 중에서 부자 영의정을 포함해 4대에 걸쳐 6명의 정승을 배풀했다.

오봉산의 다섯봉우리는 5정승을 암시하나 실제로는 여섯봉우리기 때문에 6명의 정승을 배출했다는 전설과 누명을 쓰고 조선으로 피신 온 중국지관이 굶어 죽게 된 것을 보살펴 줬더니 그 은혜로 이 터를 잡아주었다는 전설이 있고, 원래는 남의 집터였는데 터가 좋아 솔잎을 땅에 묻어 시험해 온 후 1년후 황금빛으로 변한것을 보고 후손이 비싸게 사서 집을 헐고 장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왕곡동 은행나무’는 조선 중엽 중정반정이 있던 이듬해인 1507년 정주목사를 역임한 김우증(金友曾)이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나무는 조선조 연산군 때 정주목사를 역임하고 청평군에 책봉된 김우증이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으로 이 나무를 주심으로 사방 10리를 사패지로 하사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후손들은 조선시대에는 비바람에 큰 가지가 부러질 때마다 청풍김씨 문중에서 정승이 배출돼 5정승이 나는 가문을 이뤄다고 한다.]

가을에 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들고 시름시름 떨어지면 흉작이 들었다고 하며 높은 가지부터 잎이 떨어지면 고지대부터 모내기를 시작하게 되고, 낮은 데부터 떨어지면 저지대부터 모내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왕곡동 가마터’는 화성 성역의제에 의하면 왕륜와벽소를 설치하여 대,소의 각종 벽돌을 합해 모두 69만 5천개를 제조했으며 와벽소에서 사용하는 땔 나무를 백운산 인근에서 사들여 공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왕곡동 가마터는 왕림로를 따라 백운사로 가다보면 청풍김씨 묘문비에서 남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산자락의 북동사면과 주변 논, 밭에 위치한다.

가마터는 산자락의 경사면을 이용해 축조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가마터의 크기는 길이(남동-북서) 12m이고, 너비(북동-남서)는 최대 4.4m, 최소 2m이며 높이는 1.4m이다. 요지에서는 ‘崇禎紀元後’이라고 새겨진 명문기와 2점을 비롯해 다양한 토기, 자기와 기와가 수습됐다.

한편, 가마터에서 7m 정도 떨어진 아래쪽 논과 밭에서도 돌, 벽돌, 기와, 슬래그가 섞여 있는 유구가 확인됐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여러 기의 가마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가마터 아래쪽에는 물이 흐르는 하천이 있다.

그리고 가마터가 위치해 있는 지역은 논과 밭 경작으로 인해 지속적인 파괴가 진행되고 있으며,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이 곳에서 벽돌과 기와를 생산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돼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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