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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혁 북한이탈주민 출신 전국 최초 일반직 공무원

'들키지만 말자' 인생에서 가장 긴장했던 시기

1998년 8월 어느 날 밤, 3명의 모자(母子)가 짙은 어둠을 틈타 두만강 도하를 시도했다. 시계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게다가 한 여름 장마로 강물은 턱밑까지 불어올라 있었다.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조그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거리는 100m 남짓. 마음은 조급했지만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은 조심스럽고 더디기만 했다.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는 온 힘을 다했고, 모든 촉각은 주위를 살피느라 곤두섰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듯,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머릿속에선 ‘들키지만 말자’란 단어가 맴돌았다. 그렇게 세 가족이 무사히 강을 넘길 바라고 또 바랐다.

북한이탈주민 이수혁(33)씨가 탈북 당시를 회상한 모습이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이씨는 당시를 “인생에서 가장 긴장했던 시기”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북한이탈주민 출신의 첫 일반직 공무원이다. 경기도가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행정8급 공무원시험에서 47대1의 경쟁률을 뚫고 지난해 12월 6일 최종 합격했다. 지금은 경기북부청에서 남북교류협력 및 통일교육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북한체제 의문 두만강 너머 새로운 세상 동경

책임감이 크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이씨의 인생은 큰 굴곡이 없었다.

부친은 일명 군사학교로 불리는 단천물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어머니도 결혼 전 고등중학교 교사였다. 인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시절, 부친이 뇌출혈로 사망했지만, 어머니가 곧바로 단천물리전문학교 도서관장직을 맡았다. 덕분에 가정 형편도 여유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이씨도 고교시절 우리나라 학생회장 격인 소년단위원장과 청년동맹 비서로 활동했고, 졸업 후에는 북한 보안성 산하기관인 부장보유대에서 근무하며 국가 중요시설 호위업무 등을 맡았다. 4살 터울인 형 역시 보안성 하사관으로 근무, 가족 모두가 순탄한 삶을 이어갔다.

정치사상교육에 세뇌될 법도 하지만 개방적 사고도 지녔다. 중국을 오가던 어머니를 통해 북한 밖 세상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간접 경험한 영향이다. 이로 인해 북한체제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됐고, 또 새로운 세상을 동경했다.

이씨는 “어머니를 통해 중국과 한국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다보니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었다”며 “여행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유의 제약, 외부와 단절된 생활 등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와 너무도 달랐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결국 북한체제에 대해 희망을 볼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씨의 탈북은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됐다.

당시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대외원조가 끊기면서 경제위기가 심화돼 주민들의 탈북 시도가 많은 시기였다. 그만큼 사회질서도 혼란했다.

북한 경제위기 심화로 사회질서 혼란 세 모자의 숨 막히는 탈북 시도

탈북을 결심한 세 모자는 곧바로 함경북도 온성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온성군은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투먼(圖們)시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불과 100m 남짓 떨어진 곳이다. 투먼시는 이씨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기차는 꼬박 하루를 달렸다. 세 모자의 숨 막히는 탈북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탈북 시도가 많은 만큼 감시도 삼엄해졌다. 다행인 것은 사회질서가 혼란해 보안원들에게 뇌물 제공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보안성의 승인 없이 여행을 할 수 없었지만 사회질서가 혼란했던 만큼 뇌물도 통했다”며 “아마도 어머니나 형이 보안원들에게 뇌물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보따리장수들을 통해 투먼시에 있는 외삼촌과 연락도 취해 놨다. 무사히 두만강만 건너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어머니, 형과 함께 무사히 탈북에 성공한 이씨는 외삼촌이 기다리고 있는 투먼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역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중국 공안의 단속에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 모자는 투먼시 인근 농촌인 왕청마을로 들어갔다. 농촌은 중국 공안의 단속이 그나마 소홀했고, 또 공안의 집중 단속기간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농사와 채석장, 겨울철 벌목 등 끼니를 거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모를 주민신고에 대비하기 위해 긴장의 끈은 놓지 못했다.
 

 

 


어머니!어머니!···연로하신 탓에··· 담장 못 넘고 중국 공안에 붙잡혀

왕청마을에서 3년여 간의 시간을 보낸 세 모자는 한국행을 결심, 2002년 8월 베이징에 있는 주중 알바니아 대사관의 담장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연로하신 어머니가 담장을 넘지 못해 중국 공안에게 붙들렸다.

이씨는 “당시는 중국을 거쳐 한국을 비롯한 타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탈북자들이 많아 중국 공안의 감시가 삼엄했던 시기였다”며 “연로하신 어머니가 담장을 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비록 어머니가 공안에 붙들렸지만, 가족이 함께 온 만큼 중국에서 추방당할 경우 어머니도 함께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

중국은 탈북자들이 외교공관에 진입했을 경우 필리핀과 태국 등 제3국으로 추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씨 역시 필리핀으로의 추방 형식을 빌려 간신히 한국으로 왔다.

필리핀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 이씨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바로 “공항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라는 것”. 하지만 오래지 않아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공항 어디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이씨는 “어머니를 두고 한국으로 가는 게 잘하는 것인지 아닌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괴롭혔었다”며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보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어머니와 함께 오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 내내 ‘어머니’란 단어에 가슴이 먹먹해진 듯 말을 잇지 못하던 이씨는 “현재 어머니가 정치범 수용소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의 꿈은 교사' 탈북자 남한정착 돕기 위해 공직자의 길

이씨의 꿈은 ‘교사’다. 대학교수와 고교 교사를 지낸 부모님의 영향이다.

2002년 8월 한국에 도착한 뒤 하나원에서 탈북자 교육을 이수, 형과 함께 광주로 내려간 이씨는 2005년 전남대학교 중어중문과에 입학해 학업에 전념, 중등교사 정교사 2급과 한자능력 2급 자격증 등을 취득하며 꿈을 그려 나갔다. 또 행정학을 복수전공해 공무원의 길도 다지기 시작했다.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을 돕고,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2009년 대학 졸업 후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취업에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경기도가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일반행정직 채용에 응시, 47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의 기쁨을 맛봤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 듯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끊임없이 노력해 이룬다는 뜻의 마부위침(磨斧爲針)이 좌우명인 이씨는 취업을 준비 중인 탈북자들에게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9월 조카가 출생, 한국 정착한 이후 첫 가족도 생겼다. 이씨는 당시를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꼽았다.

여건이 주어진다면 대학원에 진학, 행정학과 북한학 등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이씨는 “북한체제에서의 경험과 교직과정을 통해 배운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통일교육에 이바지하고 싶다”며 “출신을 떠나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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