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9 (금)

  • 구름많음동두천 24.0℃
  • 흐림강릉 24.9℃
  • 흐림서울 24.8℃
  • 대전 25.5℃
  • 흐림대구 29.6℃
  • 흐림울산 26.5℃
  • 박무광주 24.5℃
  • 흐림부산 25.9℃
  • 흐림고창 25.0℃
  • 흐림제주 28.4℃
  • 구름많음강화 23.8℃
  • 흐림보은 25.2℃
  • 흐림금산 26.0℃
  • 흐림강진군 26.3℃
  • 흐림경주시 27.1℃
  • 흐림거제 25.7℃
기상청 제공

조재형 경기도육상경기연맹 부회장

한국 육상이 위기를 맞고 있다. 단거리와 중장거리, 필드종목에서 세계와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한국 육상은 국민마라토너 이봉주가 은퇴한 이후 마라톤에서조차 현격하게 벌어지고 있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이 중장거리와 마라톤에 집중 투자해 한국 마라톤의 중흥기를 다시 찾겠다고 밝힌 가운데 손기정으로 시작된 한국 마라톤의 계보를 묵묵히 이어온 인물이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재형(67) 경기도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이다.

1970년대 한국 마라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조 부회장은 여느 마라토너와 달리 운동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평택 성동초-평택중을 다닐 때까지도 특별히 운동에 관심이 없던 것은 물론 중학교 시절 100m 달리기 기록이 19~20초에 그칠 정도로 운동신경과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교내 마라톤대회서 5위 입상이 계기

그런 그가 육상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1965년 평택고에 입학한 뒤 열린 교내 체육대회에서다. 학교 운동장을 출발해 평택 시내를 돌아오는 단축 마라톤에 멋모르고 참가한 그는 전교생 가운데 5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리게 된다. 의외의 성과로 학교 대표로 선발돼 학교 대항 육상대회에 출전한 조 부회장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라토너의 꿈을 품고 훈련에 돌입한다.

당시 평택고에는 유도, 역도, 체조 등의 엘리트 학교운동부가 있었다. 하지만 육상부는 없었던 터라 조 부회장은 감독교사와 코치는 고사하고 별다른 훈련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개인 훈련을 시작했다.
 

 

 


'끈기와 집념'으로 실력 '차곡차곡'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통행금지가 풀린 직후 동틀 무렵 일찌감치 등교해 학교 운동장을 묵묵히 돌며 개인 훈련을 했던 그는 방과 후에도 수 시간씩 훈련을 통해 체력을 길렀다. 겨울철 함박눈이라도 내리면 혼자서 넓은 운동장에 쌓인 눈을 넉가래로 치우고 운동을 시작했을 만큼 특유의 ‘끈기’와 ‘집념’으로 실력을 꾸준히 다졌다.

조 회장은 “입을 것, 먹을 것 없던 배고픈 시절이라 고무신 대신 단단한 고무밑창이 깔린 실내화만 있어도 감지덕지였다”며 “고기도 구하기 힘들어서 미군 부대에서 나온 버터를 밥에 비벼먹거나 찌개에 풀어 부족한 열량을 보충하면서 운동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년 가까이 묵묵히 홀로 다져온 실력은 고교 2학년이 되던 이듬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교내 단축 마라톤 우승을 시작으로 경기도 육상대회 남고부 20㎞를 제패하며 두각을 나타낸 그는 그해 서울-부산대역전마라톤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선발돼 경기도 종합우승에 기여하며 신인상을 받았다.

평택고 3학년인 1967년 첫 출전한 제48회 전국체육대회의 육상 20㎞ 단축마라톤에서 실업 선수들을 제치고 1시간5분2초의 대회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육상계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그는 그해 고교생 신분으로 육상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현재처럼 국가대표선수에게 별도의 훈련비나 피복비 등이 지원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선수촌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 그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었다.
 

 

 


'멘토' 손기정 선생과 국가대표팀 한솥밥

무엇보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당시 마라톤 국가대표 선수단장이던 고(故) 손기정 선생은 물론 최윤칠, 함기용, 이창훈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선배 지도자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멘토’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대표팀 막내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었다.

평택고 졸업 후 당시 국내 최고의 육상팀인 한일은행에 입단한 그는 실업무대에서도 중·장거리 최강자로서 오랜 기간 군림했다. 5천m 14분08초, 3천m 장애물 9분23초1, 20㎞ 1시간4분20초2 등 중·장거리에서 한국신기록을 연달아 경신하며 무서운 기세로 성장해 나갔다.

196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1회 교토마라톤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생애 처음으로 42.195㎞ 풀코스 레이스에 나선 조 부회장은 국제대회 18위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2년 뒤인 1971년 제42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19분15초8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 그는 이후 손기정 올림픽 제패 기념 마라톤 등 각종 국내 대회에서 입상했고, 1973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무더위 속에 치러진 제1회 아시아육상선수권 남자마라톤에서도 2시간27분30초2의 기록으로 월계관을 쓰며 아시아 최강자로서 자리매김했다.
 

 

 

 


일본 교토서 세운 한국신기록

그의 선수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기록은 제6회 교토마라톤대회에서 세운 한국신기록이다. 아시아육상선수권을 마치고 피로를 풀기 위해 자체 훈련을 하고 있던 1974년 1월,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이창훈 선생의 호출을 받은 그는 부랴부랴 대표팀에 불려갔다. 교토마라톤대회 개최를 닷새 남겨둔 시점이었다.

함께 출전한 박창열, 이종하의 레이스를 도울 ‘페이스메이커’ 임무를 받은 그는 얼떨떨한 상태로 레이스에 임하게 된다. 마음을 비우고 대회에 출전한 것이 오히려 몸을 가볍게 한 것일까. 페이스메이커 역할과는 다르게 그는 25㎞ 지점부터 무섭게 치고 나온 뒤 레이스 후반인 35㎞ 지점에서는 2위 그룹과 300m 이상 벌어진 채로 선두로 달렸다.

하지만 당시 한국 국가대표를 열렬히 응원하던 재일교포의 응원이 오히려 그에게 오버페이스를 불러왔다. 그는 “‘뭔가 오버하는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일본 땅에서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는 교포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한껏 고무된 채 스피드를 올렸었다”고 말했다.

결국 골인지점을 불과 2㎞ 남겨둔 40㎞ 지점에서 그는 거의 탈진상태에 빠졌고, 골인지점에 이르러 마티 부오렌마(핀란드·2시간15분10초6)와 다카다 노부요시(일본·2시간16분19초2)에 역전당해 2시간16분26초의 기록으로 참가선수 중 세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국제대회에서 월계관을 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그가 세운 2시간16분26초의 기록은 한국 마라톤 사상 최초로 2시간17분대의 벽을 깨는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이후 제28회 조선일보전국마라톤대회(현 조선일보춘천국제마라톤) 등 국내·외 대회에서 꾸준히 입상한 조 부회장은 정치적인 이념문제로 몬트리올, 뮌헨, 모스크바 올림픽에 연달아 한국 육상이 출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자 미련 없이 선수생활을 접었다.

은퇴 후에 한일합섬에 입사해 사업장에서 일반 회사원 삶을 살았던 그는 운동을 접은 지 3년 만에 뜻밖의 계기로 선수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당시 한창이던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직원들에게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마라톤 선수로서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받게 된 것. 결국 육상팀은 아니지만 개인 훈련을 통해 한일합섬의 유니폼을 입고 1977년 동아마라톤대회에 출전한 그는 정봉규, 김영관, 박원근 등 당시 톱클래스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전력에 입단해 나머지 선수생활을 마친 그는 수원 유신고 육상부에서 1년간 지도자 수업을 받은 뒤 1983년 창단된 경기도청 육상팀의 초대 코치로 부임한다.
 

 

 


한국 마라톤 '마의 벽' 깨기 일조

지도자로서 이홍렬, 윤충구(현 과천시청 감독) 등의 제자들을 길러낸 그는 당시 경희대 소속이던 이홍렬을 경기도청 팀으로 불러 개인지도를 마다하지 않는 등 철저히 조련해 1984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한국 마라톤의 ‘마의 벽’으로 여겨졌던 2시간15분대를 깨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무명이던 최경희, 장진숙 등 경기도청 소속 여자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성장시키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그는 2006년 41년간의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마감한 뒤에도 대한육상경기연맹 시설위원장, 기술위원장 등을 거쳐 현재 경기도육상경기연맹의 부회장으로서 육상 행정 분야에서도 후배들에게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조 부회장은 “점점 육상이 비인기종목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고 초·중·고 꿈나무 육성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점이 아쉽다”며 “온 국민에게 큰 힘을 줄 수 있던 예전처럼 육상이 인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남은 삶 동안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처럼 올림픽 주경기장 맨 꼭대기에 태극기가 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육상인으로서의 소망”이라며 “경기도육상경기연맹 부회장으로서 반드시 그런 감동적인 순간이 찾아올 수 있도록 후진 양성에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