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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약 사러 나가다 징집 피맺힌 이별… 통한의 思父曲

美 이리역 일대 오인폭격 참극 시작
다짜고짜 징집돼 공비 토벌 투입
작전 끝나자 동부전선으로 이동
중공군에 포위됐다 구사일생
허기·피로 견디다 고대하던 휴전 소식

 

 

피난은 미군의 오인폭격으로 시작됐다. 심해진 기침 소리가 기억 속 부친의 마지막 음성이다. 약을 구하러 나선 길이 참전길이 됐고, 아버지는 휴전을 한 해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강기원(80) 옹의 한국전쟁은 그렇게 귀를 타고 시작됐다.

▲ 이리역 오폭과 강제 징집

1950년 전라북도 이리(익산). 강(80) 옹은 17세 였다.

7월 11일, 이리 상공에 나타난 미군기가 이리역 일대에 폭격을 가했다. 미군기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던 역무원과 수백여명의 마을사람과 마을 일대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아직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참극이다.

사건 직후 강 옹은 가족들과 조부모님이 계신 팔봉면 산골로 피난했다.

1951년 7월, 1년이나 이어진 피난생활에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심해졌다. 강 옹은 약을 구하러 시내로 향했다. 그 앞을 낯선 남자 둘이 막아섰다.

“군인인지 경찰인지 그런 분위기 였는데 ‘나이가 몇이냐?’면서 도민증 달라고 독촉을 했어요. ‘집에 두고 왔다’, ‘아버지 약사러 가는 길이다’ 사정을 전했지만 무슨 헛소리냐며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더군요. 어린 나이에 기가 팍 죽어 그대로 끌려 갔지요.”

이리농과대학(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으로 끌려간 강 옹은 강당에 모인 또래들과 18세의 나이로 강제 징집됐다.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는 데는 일주일이 더 걸렸다.

“지나가는 행인한테 부탁해서 어렵게 소식을 전했어요. 어머니가 찾아 오셨는데 이미 군복까지 받아 입고 있는 아들 모습에 망연자실하셨지요.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 공비 토벌과 8사단 합류

강 옹은 5007부대(하사관교육대)로 보내져 한달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준옥 대위’, ‘차충열 조교’. 강 옹은 60년도 더 지난 이름을 기억했다.

그 해 8월, 강옹은 102사단 102연대 1대대 소총분대장으로 배속됐다. 102사단은 지리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조직된 예비사단이었다.

그러나 작전지역이 넓고 공비의 수가 많아 아군의 피해가 컸다.

“지역 경찰들과 함께 수색을 했지만, 막상 쫓아가도 늦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고를 받고 논산의 한 경찰서로 출동했는데 이미 경찰과 민간인들이 공비들에게 살해당한 후였지요. 또 한번은 사라진 소대장이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발견된 일도 있어요. 군복까지 싹 벗겨진 채. 그렇게 비참한 꼴이 없었지요.”

피해가 지속되자 육군본부는 지리산에 ‘백야전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102사단은 8사단과 6사단, 지역 경찰 등과 함께 12월 대규모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한달 가량 진행된 토벌작전은 공비 8천여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작전을 마친 102사단은 전주의 덕진중학교에 모여 해산했다.

“임무가 끝났으니 집에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102사단에서 근무한 것은 ‘안쳐준다’는 식으로 말을 했어요. 이제 부터 군생활을 할 거라며 다시 8사단으로 편입을 시키더군요.”

결국 강 옹은 8사단 10연대 1대대 3중대 2소대 1분대장으로 전속됐고, 52년 2월까지 부대정비를 마친 8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했다.

▲ 중동부전선

52년 3월, 전선은 동쪽이 북으로 크게 올라가 있었다.

동부전선 투입 직후 1032고지에서 미해병대와 교대한 강 옹의 부대는 약 3개월간 고지를 사수한 후 서쪽으로 이동해 양구지역에 투입됐다. 이 곳에서 강 옹의 부대는 한차례 중공군에 포위되는 위기를 맞는다.

“화기소대로 탄약과 중화기를 챙기다 보니 소총수 보다 철수에 시간이 걸렸어요. 스무명 남짓한 우리 소대가 포위망을 빠져나가기 전에 중공군이 일대를 장악했지요. 천만다행으로 야간이어서 그대로 포진지 입구를 모래주머니로 막고 위장했어요.”

탈출은 이틀 후 새벽에 이뤄졌다.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교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지 입구에서 “여기 있으면 안된다. 어서 철수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옹과 소대원들은 일제히 진지를 빠져나와 내달렸다.

“철수지까지 1천500m쯤 됐는데 땅이 모래여서 뛰기 힘들었어요. 연막이 뿌려져 있었지만 인기척에 적들이 우리쪽으로 지향사격을 하는 바람에 댓 명은 빠져나오다 죽고 말았지요.”

먼저 간 전우들을 애도할 새도 없이 강 옹은 중동부전선의 지형능선에 투입됐다. 수도고지를 비롯한 ‘철의 삼각지대’에 중공군의 공격이 집중되면서 8사단은 중부전선을 지원했다.

“백마고지에서 전투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느 한 쪽 고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나머지 고지도 따라서 전투를 시작했어요. 전투 때면 고지 사이가 중공군들로 새까맸어요.”

장마철이면 지형능선 일대는 아군과 중공군 시체에서 나온 피가 교통호를 타고 흐르며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강 옹은 깊게 각인된 당시 광경이 휴전 후 한동안 꿈에 나타나 잠을 설치는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 휴전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보급이 불안정해 졌다. 강 옹과 전우들은 중공군 시체에서 식량으로 보급된 미숫가루를 모아 수통에 타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어느새 중공군 사이에는 조선족 학도병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됐다.

피로가 극에 달하자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북으로 납치되는 일도 늘어났다. 사라진 전우는 다음날 인민군의 대남방송을 통해 “잘있다” “북이 살기가 좋으니 넘어오라”는 등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를 선동방송을 했다.

후방에서 정부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강 옹은 현장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이 중공군의 지원을 받아 전선을 ‘틀어막고’ 있는 상황에서 UN군만 믿고 북진을 하자는 것은, 보급도 제대로 못 받고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우리한테 얼마나 야속한 이야깁니까?”

허기와 피로 사이로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온 것은 해가 바뀌고 반년이 더 지나서였다.

1953년 7월 27일, 동부전선 854고지의 참호에서 강 옹은 전우들과 SCR-536 무전기로 휴전 소식을 접했다.

“휴전을 앞두고 바라는게 다 똑같았어요. ‘밥을 실컷 먹고 싶다’, ‘잠을 푹 자고 싶다’였지요. 휴전 방송에 맞춰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하며 어서 집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카운트다운을 마치기 무섭게 라이트를 밝힌 아군 트럭이 고지 아래로 들어섰다. 전시라면 불빛을 낼 수 없을 터였다. 건너편 적 진지로도 우마차에 매달린 등불이 보였다고 강 옹은 회상했다.

▲ 다시 만난 가족

철수해 도착한 본부에서 강 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1년 전에 도착한 아버지의 부고였다.

휴가를 받아 찾은 고향에서 죽기 전 그렇게나 큰 아들을 찾았더라는 아버지의 이야기 들으며 강 옹은 통곡했다.

국군 재편 과정에서 강 옹은 고향과 가까운 광주로 내려왔다. 31사단 창설과 조교 생활을 마친 강 옹은 56년 12월 30일 전역해 그립던 가족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다시 고향을 떠나야 했다. 알음알음으로 찾은 일이 부평의 미군부대 노무원(KSC)이었다. 1년 쯤 후, 고향에 남아있던 아내가 찾아왔다. 평택의 부대로 전근해 정년까지 근무했다.

그 사이 동생들도 가난으로 하나 둘 고향을 떠나며 소식이 뜸해졌다.

1990년 퇴직한 강 옹은 친·인척들을 수소문하며 형제들을 찾았다. 그러나 두 동생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전쟁 끝나고 가난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많았어요. 서로 먹고 사는데 바쁘다 보니 소식도 모르게 된거지요. 그나마 천우신조로 최근 남아있는 두 동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 옹은 날이 따뜻해지는 5월에 두 동생을 찾아 가평에 갈 계획이다.

가족 이야기를 하며 무겁게 가라앉는 강 옹의 목소리와 가느다란 눈매 사이로 느껴지는 쓸쓸함의 출처를 조심스럽게 가늠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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