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30 (화)

  • 구름많음동두천 25.4℃
  • 흐림강릉 29.9℃
  • 흐림서울 26.3℃
  • 구름많음대전 26.5℃
  • 맑음대구 25.6℃
  • 맑음울산 25.5℃
  • 구름많음광주 26.1℃
  • 맑음부산 26.2℃
  • 맑음고창 25.1℃
  • 맑음제주 27.7℃
  • 구름많음강화 24.6℃
  • 구름조금보은 25.5℃
  • 구름조금금산 26.1℃
  • 구름많음강진군 24.5℃
  • 구름조금경주시 24.5℃
  • 맑음거제 25.9℃
기상청 제공

독립운동가 6·25전쟁 영웅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외눈이 되어도 굴하지 않은 의병정신의 신화로 알려진 노병대(1856.12.30~1913.7.10)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고성 351고지 전투 중 백병전으로 고지를 사수하다 적탄을 맞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한 고태문(1929.1.3~1952.11.11)육군대위를 선정, 발표했다.



 

노병대(1856.12.30~1913.7.10) 선생

외눈이 되어도 굴하지 않은 의병장

속리산에서 의병 일으켜… 해산병 규합 삼남지역서 활동

일본군에 한 눈 잃어…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거 중 순국


노병대 선생은 속리산에서 거의해 삼남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체포돼 한 눈을 제거당하고 유형 10년을 받았으며, 다시 의병활동을 도모하다 체포돼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단식 28일만에 순국했다.

노 선생은 경북 상주군 화령면 관제리에서 아버지 노종주와 어머니 의성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기호 남인학자이며 당대 유림의 거두인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889년 34세에 창릉참봉이 됐다.

1882년 선생은 조선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무사를 모집해 군란에 관련된 인물의 제거를 모의했고,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해 진사 허운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론에 입각해 무너져 가는 조선의 현실 타개를 위해 적극 참여했다.

1905년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일본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선생은 북향통곡하고 서울로 올라가 거사를 간청해 고종황제로부터 밀조를 받아 거사를 계획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강년 의진에서 좌종사로 참여했다.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임용헌, 충남 연산군에 사는 김운로, 송창헌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창의했다.
 

 

 


서울시위대 및 청주진위대의 해산병을 규합해 군중이 1천여 명에 이르렀고,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해 충북 보은·청주, 경북 상주, 경남 안의·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계속 활약했다.

이후 1908년 보은 속리산에 들어와 주둔 중 일본군에 체포됐다. 체포 후 일경에 의해 한 눈을 잃은 선생은 이후 폭도내란죄로 기소되어 10년 형의 유형을 선고받았으며,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특사로 풀려났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항거하다가 강제로 출옥됐다.

출옥 후에도 선생은 의병 재기를 위해 군자금 모집을 시작해 1911년 부하들을 이끌고 풍기에서 군자금을 모집했고, 함창의 한익원과 함께 상주읍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1912년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한 후 안동의 참봉 유시일의 집에 돌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1913년 3월 12일 체포돼, 191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투지를 꺾지 않고 단식으로 항거하다 단식 28일만인 1913년 7월 10일에 순국했다.

정부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고태문(1929.1.3~1952.11.11) 육군대위

“진지를 사수하라” 백병전 중 산화

강원도 고성 351고지 방어 중 적 2개 중대 육탄전 끝 격퇴

884고지 재탈환 성공… 육군 중위에서 대위로 1계급 특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고태문 육군 대위는 1929년 1월 제주도 북제주군에서 태어나 1941년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에 입대했다.

1951년 8월 24일 제11사단 제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복무 시 펀치볼 동부의 884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한 고 대위는 1952년 11월 제5사단 27연대 9중대장으로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351고지를 점령 방어하던 중 적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공격은 다행히 방어했으나 재차 공격해 온 적의 방어에는 실패해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고태문 대위가 이끄는 중대는 죽고 사는 것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피의 살육전 끝에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혀 마침내 적을 격퇴시켰다.

이처럼 고태문 대위의 과감한 육탄공격을 계기로 884고지를 다시 확보함으로써 전선에서 적의 위협을 제거함은 물론, 군단이 목표로 한 펀치볼 동쪽에서 포위 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됐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중대의 철수를 지휘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 부하들의 철수작전을 지휘하며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태문 대위는 ‘진지를 고수하라’는 마지막 명령만을 남긴 채 끝내 전사 했으나 이후 연대는 작전대로 고지에 포화를 퍼부은 뒤 역습을 감행해 351고지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고태문 대위의 책임정신과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이러한 공적을 기려 정부는 1952년 11월 육군 중위에서 육군 대위로 1계급 특진과 함께 1952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