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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약고 폭파해 중공군 막은 ‘숨은 영웅’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전쟁과 인간, 그리고
나의전쟁 ⑭ 강 경 목 옹

1950년 봄 경상북도 상주. 강경목(82) 옹은 집안일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10대 청년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강 옹은 부모님, 형제들의 사랑을 받으며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6·25전쟁은 강 옹과 그의 가족들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전쟁 발발 후 강 옹과 그의 가족들은 전황(戰況)을 살피며 집에서 숨어지냈다. 무엇보다 강 옹은 국군의 눈에 띄면 곧바로 징집됐기 때문에 집에 숨어 매일매일을 초조하게 보냈다. 그리고 1952년 7월 강 옹에게 군대 입대영장이 나왔다.



1952년 스무살 되자 입대영장
백암산 전투 맡은 6사단 발령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기록
밤낮없이 탄약고 관리·전방에 보급

중공군 인해전술에 간부들 철수
통신마저 두절 전우들도 떠나
적에게 탄약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
탄약고 폭파 선택, 적 차단·동료 구해

휴전 후 1955년 육군 하사 제대
참전용사 부천시지회 소속 활동
잊혀져가는 전쟁, 후손에 알리려
부지런히 공적 내용 정리


◇ 제주 훈련소 입대

1952년 7월 6일 강 옹은 제주 육군 제1훈련소에 입소했다. 이제 막 스무살이 된 강 옹에게 훈련소는 공포 그 자체였다. 훈련보다 더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식사라곤 3숟가락 뜨면 전부였어요. 반찬도 없고, 수돗물 조차 없었죠.”

무엇보다 며칠간 물을 마시지 못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참기 힘들었다.

강 옹은 동료 훈련병들과 물을 얻기 위해 인근 5연대로 향했다. 6사단에서 유일하게 5연대만 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줄이 굉장히 길었어요. 인근에 있는 군인들은 죄다 모인 것 같았어요.”

강 옹과 동료 훈련병들은 긴 기다림 끝에 물어 구해 마셨다. 하지만 수질 상태가 좋지 않아 배탈이 나 곧바로 제주 98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병원 시설은 훈련소 보다 더 열악했다. 강당에 마련된 임시 병원이었기 때문에 침대도 없었다. 차가운 마루바닥이 침대를 대신했다.

강 옹은 잔꾀를 부렸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일부러 약을 먹지 않은 것.

“계속 아프면 후방 부대로 보내주지 않을까 해서 약을 먹지 않았어요.”

며칠 후 강 옹은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옆에 누워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는 거에요. 그런데 시신을 모포로 싸서 인근에 버리더라구요. 저렇게 죽기는 싫어 곧바로 약을 먹었죠.”

약을 먹은 강 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한 달 후 훈련소를 퇴소하고 육군 6사단 2연대로 발령났다.

◇ 6사단 소속… 백암산 전투

당시 6사단 2연대는 강원도 화천 백암산 전투를 맡았다. 5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백암산 전투는 6·25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강 옹은 병기 병과를 부여받고 병기중대로 소속됐다. 주 임무는 탄약고 관리다.

“주임무는 탄약고 경비와 동시에 탄약 보급이었어요. 최전방에서 실탄이 떨어졌다는 연락이 오면 곧바로 실탄을 챙겨 전방으로 향했죠. 무전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결국 밤낮이 없는 보직이었죠.”

어느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최전방에서 실탄 보급을 요청하는 무전이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겁에 질린 운전병이 못 가겠다고 떼를 쓴 것.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방으로 가야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게 정상이죠. 상관이 권총을 꺼내 겨누자 그제서야 운전대를 잡더군요.”

칠흑같은 어둠속인데도 라이트를 켤 수 없었다. 적의 시야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가시거리가 2m도 안되는 비상라이트에 의존했다.

백암산은 산새가 험해 차량 이동도 쉽지 않았다. 차는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사방에 포탄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산속에서 아군을 찾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할 만큼 위험했다.

“대치 상황이 벌어지면 돌이나 나무 뒤에 숨어 있으면 안전한데 우리는 실탄을 요청한 중대 및 소대를 찾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적의 표적에 쉽게 노출됐죠.”

그러던 어느날. 강 옹의 상관인 김 병기관이 무기와 서류를 차에 싣고는 ‘대기하라’는 말만 남친 채 다급히 탄약고를 떠났다.

강 옹은 여느 때와 같이 탄약고 내부와 주변을 정비했다. 그런데 북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수 만명의 중공군이 백암산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떼놈(중공군)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거에요. 그제서야 병기관이 다급히 떠난 이유를 알았어요. 병기관은 연대장 명령 없이는 한발짝도 움직이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죠.”

강 옹은 다급해졌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속에서 통신도 두절됐다. 탄약고를 지키던 병사 일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급박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정사정 없이 나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몇몇 전우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강 옹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최전방에서 후퇴하는 국군을 붙잡고 중공군의 위치를 물었다. 탄약고와 불과 수㎞ 밖에 되지 않는 거리까지 중공군은 진격해 있었다.

강 옹은 곧바로 연대장과 부연대장 숙소로 향했다. 그러나 간부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강 옹은 실망감과 원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 강 옹의 기지 발휘… 탄약고 폭파

강 옹은 남아 있던 탄약고 동료 2명에게 탄약고를 폭파시키자고 제안했다.

탄약고를 두고 후퇴하면 탄약이 중공군과 인민군의 손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또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지연시키는 방법은 탄약고 폭파 뿐이라고 강 옹은 판단했다.

하지만 의견이 충돌했다. 동료 1명은 강 옹의 의견을 따랐으나, 다른 동료 1명은 연대장 허락 없이 폭파시키면 후에 명령 불복종죄로 총살을 당할 수 있어 그냥 도망가자고 강 옹을 설득했다.

그러나 강 옹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동료들은 강 옹의 뜻을 따랐다.

“막막했어요. 저 역시 탄약고 폭파가 최선의 선택인지 그 짧은 시간동안 계속 생각했죠. 하지만 중공군을 막는 동시에 국군의 후퇴 시간을 버는 것은 이 방법 뿐이었죠.”

강 옹과 동료들은 탄약고 폭파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만약을 대비해 탄약도 여러개씩 챙겼다.

휘발유를 사용해 바닥에 기름줄을 만들어 탄약고 6동을 서로 연결시켜 불을 붙였다. 그리고 강 옹과 동료들은 남쪽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탄약고가 폭발했다. 강 옹은 당시 상황을 날아가던 새도 떨어질 정도로 폭발음이 컸다고 회상했다. 중공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적의 공격로를 차단하고, 무기와 탄약을 넘기지 않은 채 남아있는 동료들의 목숨을 구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탄약고 폭파 후 며칠 간은 총성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강 옹과 동료들은 산속에서 숨어 지내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수통에 물이 다 떨어질 때 즈음, 멀리서 국군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 신기해요. 정신 없이 도망쳤는데 결국 이곳에 다 모여있더라구요. 상관에게 탄약고를 폭파시켰다고 보고하자 잘했다고 칭찬을 하더군요.”

부대 복귀 후 강 옹은 다시 강원도 양구로 발령났다.

◇ 평화의 댐에서 휴전 소식

1953년 7월 강 옹은 강원도 양구 소재 평화의 댐 인근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도 탄약 운반 임무를 맡았다.

“화천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전방에 탄약을 보급했죠. 그나마 화천보다는 전투가 치열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7월 27일 낮 12시.

“12시가 되자 세상이 온통 조용했어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들렸던 총성이 싹 사라진 거예요. 이제 살았구나 생각했죠.”

강 옹은 1955년 7월 육군 하사로 제대했다.

◇ 현재

강 옹은 한 달에 한두 차례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6·25참전용사 부천시지회 사무실을 찾는다. 이곳에 모인 회원들은 지금은 여든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들이지만,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6·25전쟁이다.

강 옹은 지난해부터 6·25참전 공적을 인정받기 위해 훈장 신청 및 포상 절차를 알아보고 있다. 이미 한 두 차례 거절됐지만, 오늘도 손글씨로 본인의 공적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단순히 훈장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훈장을 통해 후손들에게 잊혀져가는 6·25의 의의를 알리기 위한 것이 강 옹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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