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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의 기쁨에 몇몇 중공군들은 아리랑을 부르고…”

 

19세 중학생이던 해 전쟁 발발

이듬해 1·4후퇴 때 제2국민병 차출

군번 없는 문서연락병 생활 최선



국군 서울 재탈환 때 인천으로 귀향

곧바로 해병대 차출… 포병대 발령

미군만 가진 VT신관 기술 포에 장착

임진강 전투서 인해전술 남침 저지



1952년 육군과 노루고지 전투

기지발휘 포소리로 적 교란 맹활약

연천서 생활 중 휴전… 1956년 제대



현재 참전유공자회 여주시지회장

독거노인 돕기·안보교육 강사 활동

우표박물관 세워 6·25 알리기 소망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전쟁과 인간, 그리고

나의전쟁 쑶 김 정 식 옹

1950년 봄. 당시 19살이던 김정식(82)옹은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김 옹은 열심히 공부하며 하루하루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김 옹은 집에 숨어 지내며 전황(戰況)을 살폈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수도 서울이 인민군의 손에 넘어가는 1·4후퇴가 발생했다. 그 길로 김 옹은 제2국민병으로 차출,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 군번 없는 군인

1951년 1월. 수도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유엔군도 철수를 서둘렀다. 김 옹은 가족들과 피난을 떠나기도 전에 제2국민병으로 차출됐다. 제2국민병은 40살 이하의 장정들을 대상으로 하는 임시 병력부대다. 그리고 그날로 경북 울진으로 향했다. 바닷가 앞 국민학교 건물이 육군 임시부대였다.

“제2국민병으로 차출되자마자 울진으로 향했죠. 어린 학생들부터 나이 많은 아저씨들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시설이 열악해 기초 군사 훈련도 이뤄지지 않았다. 전장에서 인원 보강을 요청하는 무전이 오면 총을 들고 향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다. 그리고 어느날, 한 병사가 김 옹은 불러냈다.

“저를 포함해 2~3명을 불러 세운 뒤 나이가 어려 군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김 옹은 제2국민병을 희망했다. 연고도 없는 울진에서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이었기 때문이다. 며칠간 임시 부대앞을 서성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길을 가던 육군 대대장이 김 옹을 불렀다.

“종이 한 장을 건내주더니 주소와 이름을 적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글씨를 잘 쓴다고 그 자리에서 문서연락병으로 차출됐죠.”

그날로 김 옹은 육군 103사단 110연대 제3대대 문서연락병 병과를 맡았다. 김 옹은 대대장 밑에서 군 기초 내용 등 많은 공부를 배웠다.

군번은 없었지만 나라를 위해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951년 3월 국군 제1사단이 서울을 재탈환하며 김 옹도 인천 고향집으로 향했다.

◇ 귀향 후 다시 해병대 차출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은 병력을 재정비해 북으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유엔군의 거센 공격으로 인민군은 곧바로 퇴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기쁨도 잠시, 김 옹은 곧바로 해병대로 차출돼 해병대 훈련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해병대 교관들은 매일 점호 시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기합을 줬다.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라고 했어요. 정말 무서웠죠.”

이제 갓 스무살이 된 김 옹에게 훈련소는 너무 낯선 세계였다. 훈련 보다 더 힘든 부분은 성적이었다. 해병대 훈련소는 성적을 중요 시 여겼다.

“훈련병이 전체 350명 있었는데 성적이 나쁘면 다 보병으로 보낸다고 했어요. 보병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어 밤에 불침번 서며 열심히 공부했죠.”

그 결과, 김 옹은 350명 중에 37등을 해서 포병으로 차출, 해병대 포병대 2중대로 발령났다. 당시 해병대 포병 2중대의 주둔지는 파주지역이었다.

2중대로 배치된 김 옹은 곧바로 임진강 전투에 차출됐다.

그 해 4월 파주 설마리에서 벌어진 임진강 전투는 영국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한 대표적 고립방어 전투다.

북한은 중공군 인해전술의 힘을 빌렸다. 포병과 전차의 화력지원에도 인해전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국군과 연합군은 남으로 남으로 후퇴를 거듭해 전세가 위태로웠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우리군은 낮에는 진격하고, 밤에는 철수하는 방식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했어요.”

시간이 지나자 중공군의 기세가 점차 무뎌졌다. 국군은 더욱 거세게 공격을 감행했다. 해병 포병대는 미국의 화력기술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포 공격을 개시했다.

“미군만이 VT신관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중국과 소련에는 없었어요. VT신관을 포에 장착해 폭발 방식을 자유자재로 설정할 수 있었죠.”

김 옹은 지금도 VT신관 기술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포에 VT신관을 장착하면 지상에서 정확히 50㎝ 위에서 폭발합니다. 심지어 흙 냄새만 맡아도 터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확했어요. 파편이 우박처럼 내리기 때문에 포 공격력은 인민군이나 중공군 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하지만 초(秒)를 다투는 전투로 인해 간혹 오발이 나기도 했다.

포는 가장 기본적으로 고각과 평각을 맞추고 발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각도를 설정하기 전이라도 명령이 내려오면 발사를 해야했기 때문에 아군이 아군을 해칠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 일어났다.

어느날, 김 옹과 포병들은 상관의 명령으로 적의 고지를 향해 집중 사격했다. 그런데 각도 설정이 안된 상태에서 포탄이 발사돼 아군의 OP(Obsever Point, 관측대)에 떨어졌다.

그날 밤, 김 옹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신없이 쏘다 보니 누가 OP를 향해 쐈는지 알 수 조차 없었어요.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고 밤을 꼴딱 세웠죠.”

다음날 점호를 받기 위해 포병 대원들이 모두 집결했다. 모두 어제의 사건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OP에 근무하던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날 오발된 포탄이 OP옆 소나무를 명중했다고 들었어요. 다행히 아군 인명 피해는 없었어요.”

김 옹과 포병대원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 철의 삼각지대 ··· 중부전선(노루고지)

해병대 포병대 2중대는 1952년 1월 중부전선지역으로 향했다. 철원에 위치한 중부전선은 광활한 평야로 이뤄진 지역으로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로 기록되고 있다. 이곳은 평강-철원-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로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수도 서울 점령은 시간 문제였다. 동시에 이곳을 넘지 않고서는 북으로의 진격도 불가능했다.

포병대는 육군과 함께 노루고지 전투를 맡았다. 노루고지는 노루가 누운 형상을 닮아 붙은 이름으로 피의 능선이라고도 불린다. 그 해 2월 국군 1개 사단과 중공군 40개 사단이 사흘간 교전을 벌인 끝에 아군 700여명과 적군 2천700여명이 전사했다. 그들의 피가 임진강을 붉게 물들였다고 해서 피의 능선이라고 한다.

“인민군들은 주로 새벽에 공격을 감행했어요.”

새벽에서 아침이 오기 전까지 몇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포병인 김 옹은 기질을 발휘했다.

“인민군들의 포 소리는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소리만 들어도 어디서 쏘는지, 장거리·단거리 및 화력을 알 수 있었어요.”

김 옹은 포 소리로 인민군의 공격 방향을 파악해 허를 찌르는 공격을 감행했다. 낮과 밤이 뒤바뀌었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다.

무엇보다 인민군들의 심리전은 지친 병사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저 멀리서 인민군들이 고향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동요를 부르곤했죠. 우리의 정신력을 해제 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거죠.”

그렇게 승자도 패자도 없는 노루고지 전투를 마치고 김 옹과 대원들은 부대로 복귀했다.

◇ 휴전 ··· 중공군과 포옹

1953년 7월 김 옹은 연천 고랑포지역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7월 27일 낮 12시. 싸이렌 소리가 울리자 사방에 정적이 흘렀다.

“당시 휴전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서루 부둥껴안고 눈물을 흘렸죠.”

휴전 다음날인 7월 28일. 국군과 중공군 일부 병사들은 고랑포지역에서 만남을 가졌다. 양국 병사들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포옹을 했다.

“전날까지 총을 겨누던 적에서 하루만에 전우가 되었습니다. 몇몇 중공군들은 아리랑을 불렀어요.”

휴전 후에도 김 옹은 군 생활을 더하고 1956년 제대했다.

◇ 현재

김 옹은 지난 2010년부터 6·25참전유공자회 여주시지회장을 맡고 있다.

김 옹과 지회 회원들은 후원회를 만들어 성금이 모이는 대로 지역 내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쌀과 라면을 기부하고 있다.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독거노인들을 위한 작은 일이라고 도맡아 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작은 바램이다.

김 옹은 또 지역 내 학교를 방문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안보교육을 알리는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 옹은 오래 전부터 취미생활로 우표수집을 하고 있다. 이미 수천~수만장의 우표를 수집했다. 훗날 우표박물관을 세워 그곳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우표 소개와 함께 6·25의 역사적 의의를 알리는 것이 김 옹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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