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내가 나의 타인인 줄 몰랐다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공연히 나를 힐끔 노려보고 가는 당신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내가 내리기도 전에 먼저 타는 당신이
산을 오를 때마다 나보다 먼저 올라가버리는 산길이
꽃을 보러 갈 때마다 피지도 않고 먼저 지는 꽃들이
전생에서부터 아이들을 낳고 한집에 살면서
단 한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의 타인인 줄 알았으나
내가 바로 당신의 타인인 줄 몰랐다
해가 지도록
내가 바로 나의 타인인 줄 몰랐다
-정호승 시집 ‘밥값’ 중
“당신”이라는 익명성을 벗어나 ‘나’라고 스스로 부르는 존재자의 출현, 즉 존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순간에 만나는 주체의 출현이 있을 때, 그를 두고 진정한 “나”의 출현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주체는 언제나 존재 소유로 인해 존재를 하나의 짐으로 짊어지게 된다. “주체인 나보다 앞서가는 산길이, 피지도 않고 지는 꽃들이 단 한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말하는 당신은 언제나 지금인 ‘나’이기도 하다./권오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