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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부용지(上)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 전기에는 수렵장이나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였고, 임진왜란 등 여러 환란을 겪으면서 궁궐의 소실과 재건이 반복되다가 인조시기에 후원의 본격적인 정비를 하게 된다. 특히 부용지는 인조 12년(1634)에 연못을 파고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한 기록이 있듯이 연못의 역사는 인조시기부터 시작한다.

연못 이름은 창건기인 인조시기에는 용지(龍池)라 불렸고, 숙종시기부터 정조시기까지 태액지(太液池)라 하였다. 현재는 부용지라 칭하고 있으나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아직 찾지 못했다. 부용지가 오늘날처럼 형태를 갖춘 것은 정조시기로서 ‘태액지’란 용어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태액(太液)이란 큰 연못이란 뜻이고, 중국 황궁 안에 있는 연못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태액지 영역은 궁궐의 조경 중에서도 아름다운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곳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골짜기로 동쪽에만 열려있다. 보통 골짜기의 공간배치는 열린 곳을 향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남향을 하고 있다. 태액지공간은 궁궐건축에서 측면을 주 진입으로 이용하는 특별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태액지의 공간배치는 여러번 변화하였지만 가장 큰 변화 시기는 정조 때로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정조의 즉위년(1776)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이곳을 새롭게 구성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만든 규장각도(奎章閣圖·김홍도·1776년)를 통해서 알 수 있고, 두 번째는 정조 17년(1793) 택수재를 고쳐 부용정으로 만들면서 변화를 하는데 이 모습은 동궐도(東闕圖)에 나타나 있다.

정조의 건축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규장각의 설치 이전으로 즉위 이전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택수재(澤水齋)는 숙종 33년(1707)에 건축되고, ‘영화당의 서쪽에는 연지가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의 섬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 안에 현종시기에 짓은 청서정(淸署亭)이 있었으나 무너져서 없앴다. 그리고 임신년(숙종18년, 1692)에는 다시 작은 섬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즉 인조가 만든 용지 안 현종 때 연못 안 중도(中島)에 청서정을 만들고 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던지 다리를 설치해야 하는데 궁궐 조경인 경복궁의 향원정과 규장각도의 이곳을 볼 때 이곳도 섬을 가기위한 다리가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규장각도를 보면 택수재는 하나의 독립적 공간이라기보다 섬에 있는 청서정을 가기 위한 진입공간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택수재의 위치는 국왕의 진입 동선이 어디서 오는지와 청서정에서 조망이 어디가 더 좋은지에 따라 결정되었을 것이다. 동선을 고려하면 국왕의 활동무대인 희정당 등이 태액지의 남쪽에 있지만 이곳은 서쪽에서 진입하므로 남쪽이나 북쪽이든 큰 영향이 없다. 유희공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조망은 청서정에서 급경사의 남쪽 언덕보다는 완만한 경사의 화계가 있는 북쪽 언덕이 더 좋은 경치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가지를 고려할 때 택수재의 위치는 규장각 설치 이전에도 태액지의 남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조가 즉위한 후 규장각을 설치한 후의 모습을 살펴보자. ‘일성록’의 정조 즉위년(1776) 7월11일 기록에 의하면 ‘택수재의 공사는 끝나고 규장각 공사는 며칠 남다.’라고 되어 있어 규모가 작은 택수재의 공사가 규장각보다 먼저 끝난 것을 알 수 있다. 규장각도를 통해 공간배치를 살펴보면 규장각과 태액지는 취병(翠屛: ‘비취색 병풍의 뜻’으로 친환경적인 생울타리)을 통해 나누어져 있다. ‘동궐도’를 참조하면 취병은 국왕과 왕비 및 왕세자의 영역 내에 시선 차폐 시설로 설치돼 있으며, 취병은 담장보다 쉽게 뚫을 수 있어 출입통제 보안 등의 문제보다는 시선 차단과 영역구분의 용도로 볼 수 있다.

1900년 초 일제에 의해 환경친화적 담장인 취병이 이곳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 후 오랜 기간 취병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관련학계에서 취병에 관한 논문이 나오고 학계의 쟁점이 되면서 고증을 통해 2008년 복원하게 된다. 취병이 사라진 지 100년 만의 일이다. 취병의 복원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바탕으로 3년 동안 연구하였으며, 규모는 길이 30m, 폭 0.6m, 높이 1.5m이며, 재료는 대나무로 3치(9㎝)각의 크기로 바둑판처럼 엮고 닥나무 껍질로 묶어 고정하였으며 내부에는 신우대(대나무도 조릿대사이의 크기, 번식력이 강함)를 심었다. 이로써 취병복원은 문화재보호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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