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5 (금)

  • 맑음동두천 18.1℃
  • 맑음강릉 17.9℃
  • 맑음서울 16.4℃
  • 맑음대전 17.8℃
  • 맑음대구 20.0℃
  • 맑음울산 19.8℃
  • 맑음광주 17.1℃
  • 맑음부산 17.6℃
  • 맑음고창 15.4℃
  • 맑음제주 17.9℃
  • 맑음강화 15.2℃
  • 맑음보은 16.5℃
  • 맑음금산 17.1℃
  • 맑음강진군 18.0℃
  • 맑음경주시 20.6℃
  • 맑음거제 16.4℃
기상청 제공

[정윤희의 미술 이야기]관객들에게 말장난을 거는 작품들

 

르네 마그리트의 1898년 작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하얀 캔버스 안에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고, 그 아래 문장이 하나 쓰여 있다. 그림은 누가 보아도 자명한 파이프의 형태이건만, 그 아래 쓰인 문장은 ‘이것은 파이프이다’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다. 작품이 관객들을 두고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걸까. 놀라운 일은 이 말장난 같은 작품을 두고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책 한권 분량의 에세이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과 같은 제목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이다.

현대미술의 대가 마르셀 뒤샹 역시 작품으로 말장난을 즐겨했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위에 수염을 그려 넣은 ‘L.H.O.O.Q. 수염 난 모나리자’(1919)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L.H.O.O.Q.’를 불어로 발음하면 ‘그 여자의 엉덩이는 뜨겁다’라는 뜻이 된다. 모델인 여인을 흠모하며 수년간 정성껏 ‘모나리자’를 그렸던 레오나르도가 실제로 알기라도 하면 뒤로 넘어갈 일이다. 그러나 고인에게 그리 기분나빠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자. 뒤샹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도 노는 작가였으니까. 뒤샹의 또 다른 작품인 ‘Rrose Selavy’(1921)에서는 모자를 쓴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은 다름 아닌 여장을 한 작가 자신이다. 마르셀 뒤샹이 현대미술의 형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만큼 그가 취했던 전략 역시 현대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평론가와 저술가, 철학자들은 뒤샹의 작품을 두고 열정을 다해 많은 연구를 했는데,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지점부터 미술은 대중들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숨어버렸다. 르네 마그리트와 마르셀 뒤샹이 황당한 작품을 제작한 이래, 그리고 이처럼 황당한 작품들이 미술사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무한한 지지를 얻은 이래, 미술은 더욱 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전위적인 작가들은 더 이상 대상을 ‘재현’하는데 힘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의 시선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한들 크게 실망할 이유는 없다. 본래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게 하기 위한 것이 이들 작가들이 의도한 바이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라는 것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해서 그 성격이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현대미술 작가들이 취하고 있는 수천 수 만 가지 전략 중에서 ‘말장난’이라는 전략이 꽤 유효했다는 것을 이해하자. 그것은 일종의 깐죽거림이다.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작품’이라 일컬었던 것에 대하여, ‘미술’이라고 여겼던 것에 대하여, 현대미술을 존재하게끔 하는 ‘미술관’과 ‘미술제도’와 ‘미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조롱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권위’ 앞에서의 깐죽거림, 모든 ‘개념’과 ‘언어’에 대한 깐죽거림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그림과 글의 위치는 관객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교과서나 책에서 도판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지 아래 글을 자주 적어놓곤 하기 때문이다. 뉴스와 신문에서도 사진이나 영상이 가리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막이나 제목을 달아놓는다. 하지만 요란한 뉴스들이 지나가고 난 뒤 그것을 곰곰이 되새겨보며 내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무엇이든 잘 새겨 보고 들어야 한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와 텍스트들을 꼼꼼하게 소화시키는 일이란 대중들에게 여간 복잡하고 힘든 일이 아닐 테니, 작가들이라도 이처럼 황당한 작전을 쓸 수밖에. 미셸 푸코는 많은 이들이 흔히 ‘으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숱한 언어들과 개념들이 역사를 거치면서 일종의 권력처럼 자리잡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위적인 작가들 앞에서 도전하지 못할 권력이란 없으며, 부정하지 못할 대상도 없다. 어쩌면 그것은 철저하게 권력 중심으로 판이 짜인 듯 보이는 세상에서도 조커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향하고 있는 황당한 말장난 앞에서도 관객들은 흐뭇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