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헤어지기는 서운할 때, 혹은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하고 전화를 끊을 때,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로 마무리할 때가 있다. 상대방도 ‘그래. 그렇게 하자.’ 부담 없이 대답한다. 꼭 밥을 먹자는 것이 아니라, 인사라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분을 섭취하고 시장기를 메우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에게 밥은 그런 것이다.
최근 여러 방송에서 요리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다양한 콘셉트와 재미있는 구성으로 남녀 구별 없이 프로그램에 빠져들고 있다. 실용과 재미로 시청률을 높이고 있는 이 프로그램의 핵심 키워드는 남자 요리사와 집밥, 그리고 쉬운 레시피이다. 전문 쉐프와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남성들이 함께 나와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미션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남자 연예인들이 전문요리사로부터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실습하는 프로그램도 인기를 끌고 있다. 차줌마, 백주부와 같은 정겨운 이름도 생겼다.
이렇듯 요리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집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 때문일 것이다. 집밥에는 정성이 담겨있고 기다림이 있다. 음식을 장만하는 주부는 끼니마다 가족을 생각하며 밥을 짓고 반찬을 장만한다. 그런 가운데 대물림된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있었고, 그 집만의 독특한 맛은 가문의 음식문화를 형성했다. 음식은 그 집안의 내력이면서 전통이 되었다. ‘한솥밥을 먹는다.’라는 말의 이면에는 정서적 공감, 가문의 전통이 내포되어 있다. 예전과 달리 온 가족이 둘러앉아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기가 쉽지 않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한다고 해도 외식이 많다. 도란도란 정성이 담긴 소박한 밥상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 요리사와 남자 연예인의 프로그램 진행은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남녀의 역할이 크게 달랐던 전통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의 남자가 부엌에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맛있게 먹어주면 되었다. 맛을 즐기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만드는 과정에서의 즐거움은 없었다. 이 프로그램들은 음식을 만드는 것은 가사 분담이라는 차원을 넘어 만드는 즐거움도 크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밥상을 같이하는 것이 바로 가정교육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식사예절부터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회생활의 예법교육이 밥상머리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이며, 성적이며,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다. 일방적이긴 해도 부모와 형제의 소통이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때는 ‘이래야 한다’, ‘저래서는 안 된다’ 하는 부모님의 말씀이 그야말로 잔소리였을 수 있다. 반복되는 말에 짜증이 났을 수도 있다.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그것이 교육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옛날 ‘장자’에 ‘포정’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뛰어난 남자 요리사였다. 특히 잡은 소를 부위별로 해체하는 데는 신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재능을 칭찬하니 그가 대답했다. “내가 처음 소를 잡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소뿐이었다. 3년이 지난 뒤부터는 소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영감으로 소를 본다.”고 했다. 높은 경지에 다다른 사람의 말이다. 음식 솜씨는 숙련된 기술보다 마음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서로가 바쁜 때, 아내가 서있던 자리에 남편이, 어머니가 서있던 자리에 아버지가 서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포정이라는 사람이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듯, 아버지, 남편, 남자 친구가 음식을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은 집밥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을 맛으로 채우는 멋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지금 집밥 프로그램의 인기가 특별한 맛이 있는 집안 음식문화의 복원, 그리고 소통이 있는 밥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