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어
/박용진
물방울 속에
물방울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네가 태어났다
가만히 몸을 말고 있던
가만히 착하게 사랑하고 있던
내 딸이며 누이이며 아내이며
내 투명한 고향
비도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결도 없는 물방울 속에
오로지 우리 둘만 있어
네 손끝에서 피어나던 꽃
내 손끝에서 터져 나가던 꽃
배 속에 알이 가득 차 있었다
- 박용진 시인의 시집 ‘미궁’ 중에서
이 맑고 투명한 시가 왜 슬픔을 자아내는 것일까. 물방울처럼 이렇게 가만히 몸을 말고 있는 시가 왜 아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가만히 착한 사랑만을 노래한 이 시에서 왜 눈물방울이 연상되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태초와는 달리 지금은 억수로 비가 내리고 바람만 몰아쳐 불어서 일까. 지금은 거칠고 사나운 결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일까. 네 손끝과 내 손끝에서 피어나던 꽃의 시절은 어디로 갔나./김명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