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막다 - 하멜서신
/신덕룡
길이 떠나고 난 자리가 온통 구멍이다.
언제 떠난다는
어디로 간다는 귀띔조차 없었으니
애시당초, 길은 내 안에 속해 있지 않았던 거다.
여운조차 남기지 않은
길이 빠져나간 내 몸의 사방은 왜 이리 깊고 어두운가.
오래전에 덮어둔 채 던져놓은 어둠 속에서
침묵과 침묵이 몸을 부딪쳐
흠집내며 질러대는 아우성이 이와 같은가.
그러니 숨죽이고
느닷없이 사라진 발자국 소리, 부재의 흔적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 끝에도
더듬더듬 찾아야 할 길이 있다고 믿으면서.
- 신덕룡 시집 ‘하멜서신’
애시당초, 우리에게 길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모두 없는 길을 만들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서 표류하면서 더듬더듬 지탱해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길마저 나에게서 떠나버렸다고 생각해보자. 발을 디디는 곳마다, 내미는 곳마다 온통 구멍투성이일 것이다. 움푹움푹 빠져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는 어둠 속에서 견뎌내야 했던 침묵들이 터져 나오며 아우성을 칠 것이다. 그 아우성에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귀를 막고서라도 우리는 길의 흔적을 찾아 나설 수밖에는 없다. 길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길의 의미를 굳게 믿으면서./김명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