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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다시보기]전략가 링컨과 남북전쟁

 

링컨을 공부하면서 가슴을 강하게 때린 대목이 있었다. 그가 수행한 대통령 직무는 절대자의 철저한 섭리였다는 각성이었다. 절대자는 그에게 특별한 책무를 담당시키기 위해 대통령이 되게 했고, 그 임무를 끝내자 그의 생명을 거둬갔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 8일 만에 남북전쟁은 터졌고, 승전한지 5일 만에 그는 총탄에 쓰러져, 다음날 사망했다. 링컨의 대통령 재임기간과 남북전쟁 기간은 거의 일치한다. 불과 한 달하고 2주 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어찌 과업과 관련한 절대자의 계획이 아니겠는가. 절대자는 그 일을 위해 그를 맞춤형 인물로 단련시켜 도구로 사용했다. 노예해방과 미국통합의 과업을 감당하도록 링컨으로 하여금 고독의 광야를 지나게 했고, 눈물의 강을 건너게 했던 것이다.

링컨은 전략가로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전쟁초기 링컨이 단계적으로 취한 행동을 보면 그가 전략적 핵심사안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통제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야당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링컨은 저명한 야당 정치인들을 군의 요직에 새로이 임명하거나 유임시켜 야당의 협력을 끌어내기에 노력했다. 여당인 공화당이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링컨의 관심은 오직 민주당 의원들과 접경주의 연방주의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1861년에서 186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내내 그는 자신의 ‘남부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우선 노예제도의 합법적인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접경주의 연방주의자들을 안심시키고, 남부의 분리 상태를 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진보진영의 성급한 요구를 억누르고, 점진적 온건주의의 입장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2월 22일 전 병력에 총진군을 명령한다.

링컨의 거듭되는 요구에 연방의회는 연방헌법을 개정하고 노예제도 반대조항을 추가했다. 연방을 구할 목적으로 시작한 전쟁은 그의 지도력 하에 서서히 노예해방을 위한 대리전으로 발전해 갔다. 전쟁이 유리해 지면서 62년 9월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하고, 63년 1월 1일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노예해방 선언은 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결국 그의 군사적,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흑인 20만 명의 참전을 끌어냈다.

“5만 명의 잘 훈련된 흑인병사가 미시시피강둑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반란군은 즉각 항복할 것이다” 링컨은 노예해방 선언을 통한 흑인의 참전이 남부군을 약화시키고, 연방군을 강화시켜 전쟁의 조기 종결을 불러올 대단히 효과적인 수단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소유 노예를 입대시킨 소유주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노예해방 보상제를 강하게 밀고 나갔다.

노예해방 선언 불과 1년 만에 연방 안에는 수병, 군인, 노역자로 종사하는 흑인이 15만 명으로 불어났다. 전쟁 끝 무렵에는 연방군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흑인의 수가 거의 19만 명에 달했다. 노예들은 남부 연합을 내부에서 약화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군인, 선원, 마부, 그리고 일꾼으로 연방에 종사한 흑인 20만 명이 없었다면, 연방은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을 것이다.

링컨은 청년시절 잠깐 민병대 근무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군사전략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며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전략가로 거듭났다. 휘하의 어떤 지휘관보다도 가장 먼저 연방군의 수적 우세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바탕으로 ‘여러 곳을 동시에 공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지역 점령 보다는 적군을 추적해 섬멸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임을 강조했다. 북군 사령관이 게티스버그에서 승리한 뒤 퇴각하는 리 장군의 군대를 더 추적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그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원래 군사학을 배운 적이 없었고, 그래서 휘하 지휘관들은 그의 전략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링컨은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누구보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것이다.

전쟁 막바지에 링컨은 남부 연합 대표들과의 평화회담을 결렬시키고 항복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부군 총사령관 리의 군사협정 제의를 거부한다. 그는 ‘하나의 연방’으로 초지일관했던 것이다. 전략가 링컨은 전략적 핵심 사안에 집중하고 어떤 상황도 회피하지 않았다. 때로는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때가 무르익자 인종문제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천부적으로 전략적 직관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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