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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나의 자리는 지금 어디인가?

 

스스로 그러하게!

자연(自然)을 일컫는 말이다.

세상에는 이치가 있고, 그 이치가 모든 자연계의 집단들에게 규범으로 자리한다는 뜻일 것이다. 자연계에는 다양한 식물군이 존재한다. 봄에 종자(種子)를 뿌려 싹을 틔우는 종(種)이 있는 반면, 가을에 뿌려 봄이 되서야 싹을 틔우는 종자가 있다. 그중 산수유(山茱萸)는 가을에 씨를 뿌려야하는 대표 종중에 하나다. 무려 2년간 노천에 매장했다가 늦가을 대지에 뿌려진 종자는 서리와 눈을 맞고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역경을 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기다린다. 그리고 볕 좋은 어느 봄날 종의 영속을 위한 자연의 질서는 딱딱하기만 했던 작은 종자를 발아시킨다. 종자! 그 성체가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은 자연계의 순리이자 이치인 것이다.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그리 하라고 하지도 않지만 스스로 그렇게 그 약속을 준엄하게 지켜내고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알고 있다. 이 질서 중 어느 하나가 깨지거나 무너진다면 주체할 수 없는 혼란과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것을!

몇 해 전 늦겨울의 일이다. 눈밭에 서있는 산수유 나뭇가지에 수도 없이 빨갛게 달려있는 열매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한참을 보고 있자니 가지 끝에 기대어 아등바등 붙어있는 수많은 종자들에게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삼삼할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를 꺾어와 화병에 꽂아 볕 잘 드는 창 앞에 두었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난 오후의 일이다. 문득 바라본 가지에서 빨간 열매와 노란색의 꽃이 한 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뜻밖의 묘한 상황이 신기도 하거니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요놈들 봐라! 하며 살며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또한 자연의 조화다.

그리고 또 몇 날이 지나고 화병 아래에 흩어진 붉은 종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꽃이 피기 전에는 힘주어 강하게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던 것들이 꽃이 피고 나니 손만 대도 후두둑 힘없이 떨어지며 자리를 내어준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섭리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내가 앉았던 그 자리를 다음에 오는 고단한 사람들을 위해 홀연히 내어주는 법이다. 그것이 우주의 질서라고 자연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문득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 중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가치란 애면 불면하며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닌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하고, 그 하나에 매달려 우를 범하며 큰 것을 놓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금 나의 자리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자리이다. 나 또한 물려받은 자리이기에 “나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소임을 다한 후 누군가에게 필연적으로 물려줘야 할 자리인 것이다. 시인 조병화(趙炳華)는 ‘의자’라는 시에서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른 올바른 세대교체의 당위성을 이야기함은 물론 낡은 것은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고, 그 바탕 위에서 계승과 발전을 거듭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의자는 힘들거나 필요한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 자리는 나만의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연연해하거나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규칙과 규범은 사회구성원간의 약속이다. 이 준엄한 합의를 어기고 깨트리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직과 단체의 퇴보와 근간을 흔드는 일이자 파괴행위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난 봄! 얼음장이 녹기도전에 온 대지를 노랗게 물들이며 봄 축제를 벌였던 산수유 꽃들의 향연도 맹하(孟夏)의 계절 앞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세월의 오고감을 알리는 것이 그 소임이고 보면 말없이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리한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우리는 위대한 저 자연을 통해서 이 준엄하고도 정연한 진리를 배워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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