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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숙영의 젠더프리즘] 창작의 자유와 성 착취

 

2007년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파격적인 정사신으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장아이링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여성 스파이 정핑루(鄭平如 1918~1940)를 모티브로 삼는다. 일제가 점령했던 1930년대 상하이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왕치아즈는 정핑루라는 인물의 행적을 따라간다. 왕치아즈는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를 척결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접근해 유혹에 성공하지만,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는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 거의 비슷하다.

 

영화는 사실적인 정사 장면을 통해 암울한 시대와 인간의 욕망,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담아낸다. 길고 노골적인 성애 장면은 스크린 안에서 주제와 어우러져 예술로 승화되었다. 이처럼 예술의 영역에는 아름다움과 고귀함뿐 아니라 추함과 농도 짙은 에로티시즘까지 포함된다.

 

최근 청와대 청원 20만 명을 넘기며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청원인들에 의해 심판의 무대에 오른 알페스는 팬덤이 만들어낸 하위문화의 한 장르이다. 'RPS(Real Person Slash)'의 한국식 발음을 붙인 알페스는 주로 남성 아이돌의 동성애를 그리는데, 여성 아이돌이나 팬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알페스의 작가는 실존하는 유명인의 이름을 차용하고 이들이 각종 매체에서 보여준 특성을 모티브로 상상의 나래를 펴지만 주류에 편입되지는 못한 채 소모되는 창작물을 생산한다.

 

알페스를 n번방과 비교하며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여성혐오주의자들의 물타기 전략이다. n번방은 생존하는 여성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신체부위를 촬영하고 성적 모욕과 폭력을 행사하는 성착취 범죄이며 처벌의 대상이지만, 알페스는 대중문화가 양산한 소비의 한 형태로 창작 행위라는 점에서 엄연히 다르다. 실존 인물을 다루어 명예를 훼손했다면 당사자의 문제제기가 있어야 할 것이며, 예술적 측면에서 비판한다면 완성도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팬들의 상상력을 동원한 글쓰기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되거나 법을 제정해 행위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창작의 자유를 옭죄는 일이다.

 

노골적인 성 행위 영상을 보고 싶다면 성인 영화를 보면 되고, 노골적인 성 행위를 묘사하는 글을 읽고 싶다면 19금 소설을 이용하면 된다. 성인의 합법적인 소비를 위한 합법적인 콘텐츠는 넘쳐 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제작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굳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불법 동영상을 시청하려고 하는 걸까. 몰래카메라나 성적 착취에 의한 제작은 범법 행위이고, 이를 이용하는 것은 변태적 관음증의 충족을 위한 범죄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일까. n번방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해 성 착취 사건을 물타기 하려는 일부 연예인과 정치인의 놀음에 피해자들의 고통이 더 깊어진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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