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의 배는 공포로 헐떡거렸다. 비거가 한발짝 다가가자 쥐는 새까만 구슬 같은 눈을 반짝이며 작은 앞발로 허공을 초조하게 할퀴어댔다. 그리고 대들 듯이 길고 가는 소리를 냈다. 버거는 프라이팬을 던졌다.” 매우 큰 놈이었다. 조그만 생쥐를 일컫는 마우스가 아니라 랫(rat)이다. 쓰레기든 뭐든 닥치는 대로 먹고 몸집이 커졌단다.
이 흉물을 잡은 비거(Bigger)는 이름대로 덩치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뭘 하나? 그의 집은 그런 쥐가 살기 딱 좋게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 프라이팬에 으깨진 쥐의 운명은 비거의 운명과 닮았다는 걸 아직은 모른다. 조만간 그도 그렇게 때려잡힐 운명이 된다. 리차드 라이트의 소설 ‘미국의 아들(Native Son)’의 첫 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인종주의와 결합된 흑인 빈민들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쓴 리차드 라이트는 이 작품의 서두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처한 성서의 인물 욥 이야기를 담은 ‘욥기’의 한 대목을 옮겨 놓는다. “오늘 또 이 억울한 마음 털어놓지 않을 수 없고 육중한 손에 눌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겠구나” 누구도 들어주지 않은 고난. 그래서 쏟아내는 통곡이다.
마틴 루터 킹이 “나에게 꿈이 있다”고 외쳤을 때 말콤 엑스는 “너의 꿈은 우리에게 악몽”이라고 맞받아친다. 여기서 “너의 꿈”이란 백인들이 내세우는 ‘아메리칸 드림’이다. 흑인들을 짓밟고 만드는 꿈이란 기만이고 그러는 사이에 흑인들은 쥐처럼 쓰레기통에 살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순진하게 세상 보지 말란다. 욥의 처참함은 흑인들에게 일상이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체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힌 두 백인 청년의 탈주극을 그린 실화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Escape from Pretoria)’는 보는 내내 숨이 막혔다. 팀 젠킨스의 소설 ‘인사이드 아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고투를 치열하게 보여준다.
폭력과 억압이 원칙인 프레토리아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놀랍게도 나무로 수십개의 열쇠를 깎아 16개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이들을 살려낸다. 인종차별 반대 문건을 도심에서 뿌린 죄가 12년 징역이라니. 이들은 마침내 탈주에 성공하고 아파르트헤이트도 종식된다.
촛불시민 혁명 5년. 정세는 도리어 암담해 보인다. “잔혹한 법치”가 지배하고 있는 와중이며 언론의 야비함이 도를 넘은 지는 오래다. 억울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이 쥐의 처지가 될 수는 없다. 기득권 카르텔이 지속시키고 있는 공고한 차별체제가 계속 작동하게 할 수도 없다. 이로부터의 대탈출이 절실하다.
다시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열쇠를. 나무로도 만들 수 있는. 우리 손에 있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