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라의 작품 『돈』 ‘사카르’라는 인물은 한때 잘 나갔다가 파산을 한 뒤, 여기저기 사람들을 끌어모아 출자를 통해 신디케이트 회사를 꾸려 ‘만국은행’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는 주가조작을 통해 주식의 가치를 한껏 부풀려 그 차익을 온통 뻥튀기를 하다가 결국 몰락하게 된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렸지만 망해버린 것이다. 때는 나폴레옹의 조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집권했던 프랑스 제2 제정 시기에 속하는 1860년대 말에서 70년의 시기였다. 이 사건은 에밀 졸라의 작품 <돈(L’argent)>의 줄거리에 담긴 내용이다. 자본과 욕망이 한 몸이 되어 유럽의 수도 파리를 휩쓴 광기와 이에 덩달아 놀아나게 된 프랑스 대중들의 모습을 에밀 졸라는 촘촘한 취재와 놀라운 문학성으로 그려냈다. 1871년 <루공 가(家)의 행운(La Fortune des Rougon)>이 그 첫 번째 이야기라고 한다면 <돈>은 20년 뒤 출간된 소설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사를 표현해내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루공-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 가운데 하나였다. 이 총서는 무려 18권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에밀 졸라 문
- 쿠보타 망언의 계보 1953년 10월 15일 한일교섭 3차 회담의 재산청구권 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한국 측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한국민족이 겪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옥과 학살, 조선 민중의 인권박탈, 식량 강제공출, 노동력 착취 등에 대한 피해를 강조하자 일본 측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폈다. "그렇다면 일본 측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바꾸었고 철도와 항구를 건설했으며 농지를 조성했고 대장성은 때로 2천만엔의 돈을 당시 조선에 지출하기도 했다. 일본은 한국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다.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이른바 ‘역(亦)청구권 논리’를 폈던 것으로 3차 협상을 결렬시켜 1958년에 가서야 4차 교섭이 있게 한 ‘쿠보타 망언’이다. 이는 당시 일본 측 수석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발언으로, 식민지 지배는 조선인들에게 유익했고 일본이 아니었다면 더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수탈과 탄압, 학살과 전쟁동원으로 점철된 시기를 조선인들의 복리를 향상시킨 지배라는 말에 한국사회 전체가 격분했다. 한일교섭이
- 과학의 고독 지구 전체가 하나의 자율적 조직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한 ‘가이아’의 개념은 애초에는 허무맹랑한 주장처럼 여겨졌다. 환경이 생명체를 지배하는 것이지 생명체가 환경을 바꾸어내기도 한다는 논리는 가당치도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가이아’라는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이름은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주기에 적당하기 조차했다. 사실 이 명칭은 제임스 러브록과 이웃해 살고 있던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의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이 지어준 것이었다. 골딩은 훗날 (198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과학과 인문적 사유가 만나 ‘가이아’라는 이름이 생겨난 셈이었다. 제임스 러브록이 80세(2000년)를 막 넘기면서 출간한 자서전 『가이아에게 경의를 (Homage to Gaia)』에는 양자역학의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1936년에 했던 말을 인용해놓았다. 자신의 이론이 처음에는 거부되었다가 40년이 지나 책이 나온 당시에는 지구과학의 한 중심이론으로 수용된 것을 기뻐하면서 과학자가 겪어야 하는 고독에 대한 심정을 인용으로 대신 풀어놓은 것이었다. “새로운 과학적 사유는 아무리 조직이 잘 되
-인류세, 여기서 마무리 되는가? 인간의 미래는 어디에 달려 있을까? 오늘날 기후위기를 인류 전체가 마주한 가장 위태로운 사건으로 여기는 절박감은 한국 사회에서는 의외로 강하지 못하다. 기후정치는 우선 순위의 상위권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가는 기본이 무너지고 있는데 "그냥 어떻게 되겠지" 한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해온 시대가 마감된다는 ‘인류세(Anthropocene)의 종말’이 경고되고 있어도 꿈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온 문명이 도리어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Distopia)의 도래에 대한 걱정은 소수의 기우(杞憂)로 취급된다. 과연 그럴까? 최근의 제임스 웹(James Webb) 우주 망원경이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별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다시 깨우친다. 오랫동안 우리의 우주 시력(視力)을 받쳐준 허블 망원경의 차원을 넘어 우주의 탄생과 우주에 새겨진 생멸(生滅)의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들은 지구의 나이 45억년과 맞먹는 시간을 거쳐온 빛의 풍경을 보여준다. 칼 세이건(Carl Sagon)이 1990년 보이저(Voyager) 1호가 찍은 지구를 보고 “창백하고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불렀
대일배상 요구, 그 시작과 역전 1947년 8월, 남조선 과도정부는 “대일배상요구 조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일(對日) 강화조약(講和條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이 문제를 정식 제기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조사위원회는 해방 당시 일본이 다급하게 남발한 조선 은행권 45억원의 발행보증으로 남긴 공채보상과 반출한 금괴반환 등을 요구하면서 민간피해에 대한 내용도 다음과 같이 그 피해목록을 정리했다. 항목당 자세한 내용이 있으나 일단 제목만 거론해보겠다. 이는 당시 조선은행 업무차장이었고 훗날 한일교섭 과정에서 재산청구 위원회 대표가 된 이상덕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1) 약탈에 의한 손해 (2) 강제동원된 전쟁의 결과로 받은 손해 (3) 학대 강탈에 의한 손해”로서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피해를 목록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요구의 논리는 “징벌적 보복조처로서의 부과가 아니라 희생과 피해 회복을 위한 공정한 권리의 이성적 의무 이행”이었다. 이보다 앞서 1945년 11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대일배상사절단 단장 폴리(Edwin E. Pauley)를 동경에 파견했고 그 다음 해인 1946년 남한에도 보내 상황진단을 지시했다. 이
-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연구 “계엄령으로 군대가 조선인을 죽이기 시작하지요. 동시에 경찰은 조선인 폭동을 선전합니다. 이를 본 민중은 자신들도 나라를 위한다며 재향 군인, 청년단, 소방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자경단을 조직합니다. 그들은 조선인 사냥에 나서서 조선인이 판명되면 죽였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과 관련한 재일 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의 진술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단지 보통의 일본인들이 저지른 학살이라기보다는 이 학살에는 국가가 개입, 주도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엄령은 내란 또는 전쟁 때 발령됩니다. 그런데 왜 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대해 계엄령이 발령되었을까? 그리고 내란을 일으킨 자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질문을 실마리로 해서 강덕상은 1975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을 펴낸다. 국가에 의한 학살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진행되었는지를 사료(史料)와 증언으로 분석한 결과물이다. 그는 이후 『여운형 평전』을 2002년부터 시작해서 2019년까지 무려 17년간 네 권까지 마무리해서 출간하게 된다. ‘강덕상’이라는 이름이 국내까지 뚜렷하게 알려진 결정
- 발틱함대와 일본 해군 “두 줄로, 마치 바둑돌을 나란히 놓는 것처럼 저렇게도 정연하게 대오를 짤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 함대의 위용을 본 놀라움은 지금도 온몸에 남아 있어.” 러-일 전쟁의 최후결전 쓰시마(對馬島) 해전(海戰) 장면을 목격했던, 이제는 80살의 노인이 된 이의 증언이라며 일본의 이른바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기록한 대사다. 러시아의 세계 최강 발틱함대와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함대의 격돌 직전의 장면이다. 이는 그가 쓴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의 한 대목으로 국내에서는 1979년 『대망(大望)』이라는 장편 시리즈의 35권에서 37권으로 번역되어 꽤나 읽혔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육군의 신이라고 한다면 도고 헤이하치로는 해군의 신이라 불렸던 자다. 이 작품은 명치유신 이후로부터 러-일전쟁 승리까지 다룬 역사소설로 일본의 해군력 증강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해전의 승패가 일본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 시바 료타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 역사를 어떻게도 해석하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해를 지키려는 이 해전에서 일본 측이 졌을 경우 그 결과에 대
- 피보호국이 된 조선 “한국은 어떻게 오늘날 생존하게 되었으며 또 한국의 독립은 누구의 덕택입니까?”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질문에 고종(高宗)은 속으로는 불만스러웠겠으나“짐(朕)도 그에 대해 능히 잘 알고 있다”고 답한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영향력을 분명히 한 일본에게 고종이 달리 뭐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어 이토는 고종에게 내궁(內宮)에 보관된 모든 외교문서의 원본제시를 요구했고 내궁의 무녀(巫女)들을 내쫓을 것이며 일본 관헌인 고문(顧問)경찰이 왕궁경비를 맡는다고 통지했다. 이와 함께 “폐하가 대소사를 불문하고 모든 정사에 간섭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보호권’이라는 이름 아래 국권이 1910년 병합(倂合) 이전에 이미 일본에게 거의 대부분 넘어가는 한일협약(을사늑약)이 1905년에 이뤄지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 전문(前文)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일본국 정부 및 한국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데 이해가 같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한국의 부강지실(富强之實)을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아래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조건부로 되어 있지만 그걸 일본이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삼은 대목도 말
-자객 그리고 암살 1894년 3월 28일 오후 두시 경,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여관 동화양행(東和洋行) 2층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 소리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은 그저 축제에 쓰이는 폭죽(爆竹)이 터지는가 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숙박 명부에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라고 적힌 인물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본명은 김옥균(金玉均). 갑신혁명의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쏟아져 흘러내렸다. 10년 망명(亡命)의 한(恨)을 뒤로 하고 동양 3국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보려 했던 풍운(風雲)의 혁명가 고균(古筠) 김옥균의 절명(絶命)이었다. 그가 숙박부에 적은 이름 산와(三和)는 훗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 씨를 뿌린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일컫는 것으로, 한때 그의 적수(敵手)였던 청(淸)의 리홍장(李鴻章)과 담판을 지어 실현해보려 했던 동아시아의 미래상이었다. 그의 상하이 행을 말리던 이들에게 고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간 만사 운명이 아니겠는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 가서 죽음을 당할는지 유폐(幽閉)의 처지가 될는지 모르나 단 5분이라도 리홍장과 담판을 지을 기회가 온다면 리홍장은 내 것이다.”
민비의 질문, 그리고 위태로운 혁명 “경(卿)들이 지금 말하는 변란(變亂)은 청나라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일본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김옥균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고종과 민비에게 급변이 일어났으니 속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하자 민비가 날카롭게 쏘아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이는 정세의 축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기습적인 반격이었다. 또한 외세의 위력이 주도하고 있던 현실에서 그 어떤 정변(政變)도 국제적 관계와 밀접하게 돌아가는 것을 인식한 발언이기도 했다. 거사는 이미 시작되었고 군주(君主)를 자신들의 손에 장악하는 것이 승패의 요체였는데 여기서 주춤거리면 잠시의 지체도 전체의 흐름을 끊어버릴 수 있다. 때마침 폭음(爆音)이 터지자 피신해야 할 상황이 명백해졌다. 주변에 조선 호위군이 없자 고종은 일본군이, 민비는 청군이 호위해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이미 짜놓은 대로 일본군 출동을 위한 수순으로 들어가야 했다. 박영효가 백지를 펼쳐 들자 왕은 노상에서 김옥균이 말하는 대로 “일본공사래호짐(日本公使來護朕/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를 쓴다. 이 칙서(勅書)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