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정치의 고통과 그 반전(反轉) “신자유주의의 출생지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 어찌하여 불평등의 부담을 가난한 사람들만 지게 하는가? 이런 현실을 반드시 끝내겠다.” 올해 35세인 젊은 사회주의 정치가 가브리엘 보리치가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쏟아낸 뜨거운 육성이었다.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 아옌데 암살 이후 50년 만의 일대 사건이다. 보리치의 당선에 칠레의 청년세대는 열광했고 라틴 아메리카 정치는 새로운 희망을 목격하고 있다. 그건 오래 전 일어났던 비극의 기억이 겹치면서 더더욱 의미심장했기 때문이었다. 1973년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미국의 지원 아래 군사 쿠데타를 있으킨다.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대통령 닉슨에게 라틴 아메리카에 좌파정권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아옌데 정권 전복이 필요하다며 칠레 군부를 통한 군사 쿠데타 기획을 강력히 주문한다. 칠레의 암흑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선거로 당선된 사회주의자 아옌데는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고 미국은 칠레를 파시즘과 결합한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으로 만든다.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공적 통제를 반대한 하이예크의 제자 밀턴 프리드만이 이끈 이른바 “시카고 학파”의 이론은 이렇게
-군산복합체의 등장 “맥더글러스(Mcdouglas) 없는 맥도널드(McDonald) 없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얼핏 단어와 발음도 비슷한 이 조합은 군수산업과 미국 자본주의의 대표 상징의 결합이다. 전쟁경제체제로 무장한 토대 위에서 번성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대를 일깨우는 말이다. 제국주의의 군사적 토대와 자본이 하나의 몸이 되어 움직이는 걸 보여준다. 1961년 1월 20일, 퇴임하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TV로 중계된 고별사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최근까지 세계적 대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은 영구적 군수산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군수산업 시스템을 장착한 나라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합법적 권력도 아니며 그 권위가 인정되지 않은 영향력(unwarranted influence)에 의해 장악되고 위협받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바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다.” “군산복합체”라는 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시작이었다. 그는 이를 가리켜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그런 위치를 준 바 없는 권력의 재앙적 수준의 등장이 가진 위력(the pote
- 포르노와 딥페이크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포르노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녀가 등장한 포르노 영상이 걷잡을 수 없이 온 지구에 공개되고 있었다. 2018년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대담에서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렇게 하소연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더라고요. 모든 나라에 가서 일일이 다 그 영상을 다 내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이러다가는 누구라도 영상조작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AI를 동원한 이른바 심층조작 테크놀로지 ‘딥 페이크(Deep Fake)’에 대한 이해가 없었더라면 스칼렛 요한슨은 명백한 영상증거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할리우드 인기 여배우가 이런 식으로 피해자가 되고 있는 딥페이크는 오늘날 포르노 시장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기술이 되고 있다. 이 같은 영상뿐만이 아니다. 이방카 트럼프와 미셀 오바마가 함께 변태 성행위를 하는 걸 빌 클린턴이 보고 있는 영상도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판국이다. 바로 이런 딥페이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상도 딥페이크로 만들어진 바 있다. 오바마의 영상이었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영상에서 딥페이크 기술로
-드라마 <지옥>의 “시연”, 그 공포 사람이 죽는 걸 모두가 보면서 그를 구하려 들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거나, 또는 그걸 즐기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도 누군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데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상황을 압도하면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걸 모두가 무슨 연극을 관람하듯 보면서 즐기거나 환호하기는 어렵다. 혹여 그러는 경우라도 바라보면서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공포의 작동과 지배”는 이런 현장을 주도하는 자들의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이다.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의 관심을 모은 연상호 감독의 드라마 <지옥>이 말하는 “시연(試演)”이 이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죽음이 미리 고지(告知)된 사람이 죽음의 사자(使者)에게 지옥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생중계하기조차 한다. 고지된 당사자에게 중계료 30억 원이 거래되는 일도 일어난다. 이왕 죽게 된다면 그 돈을 유가족이 되는 아이들에게 주겠다고 마음먹는 어느 엄마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지옥의 사자로 짐작되는 괴생명체의 습격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그리고 이 사건의 비밀은 사실
포퓰리즘, 그 진실은? 정치에서 “포퓰리즘(populism)”은 비하(卑下)의 언어다. 이 말은 가치나 원칙없이 대중들의 욕망에 영합해서 표를 모으는 행위를 지탄할 때 등장한다. 그렇게 인기에만 기대는 정치인은 “포퓰리스트(populist)”라는 공격을 받는다. 사실이 아니라도 정적(政敵)을 모함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대마다 같은 단어라도 그 의미가 달라지긴 하나, 사실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이다. 이 단어는 “피플(people)”에서 나온 것이자 미국의 내전(Civil War)인 남북전쟁 당시인 1863년 에이브라함 링컨이 게티즈버그에서 행한 연설로 더욱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민주정치의 주체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데 ‘people’은 ‘국민(the nation)’이 아니라 ‘인민(人民)’이다. 링컨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와 일치한다. 이 인민을 앞세우는 사상과 태도가 “포퓰리즘”이다. 그 정확한 번역은 “인민주의”가 되는데
-외교적 결례? 누가 미안해야 하는가? 외교관계에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이걸 상대를 곤란하게 한다고 “결례”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최근 이재명 후보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발언에 대한 어느 언론의 공격은 “아는 체한다”였다. 실체도 없는 걸 가지고 이른바 “운동권적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과 세력은 정치적 공격을 위해 엄연한 역사적 진실조차도 왜곡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고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더더욱 역사논쟁을 벌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간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恩德)을 모르는 망덕(亡德)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는 “역사 지식의 틈새”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건 “틈새”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황무지”다. 우리의 교육체계에서 역사과목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중이다.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낼 국민적 상식이 되어야 할 바가 단순 암기과목으로 처리되고 국영수에 밀려 변두리로 쫓겨나고 있은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이런 역사왜곡 전문가들의 기만이 통하기도 한다. 역사교육을 쥐고 있는 쪽이 그 사회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중대한 영역을 이 나라 국가교육 체계는 철저하
-<펜타곤 페이퍼>, 그 기만과 공화국의 위기 “거짓, 기만, 정보의 의도적 왜곡과 조작, 그리고 아예 대놓고 하는 거짓말이 정치적 목적을 이뤄내기 위한 합법적 수단이 되고 말았다. 이제 진실은 정치적 덕목이 더는 아니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정치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거짓말 정치가 팽배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는 거짓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짓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보다 더 설득력있게 들리고 이성에 대한 호소력이 강력하다. 거짓말을 하는 쪽은 그걸 듣고 있는 이들이 무엇을 듣기 원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을 듣는 쪽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말을 듣기 때문에 기획된 거짓을 신뢰할 만하다고 믿어버리고 만다.” 한나 아렌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1971년 미국의 월남전 비밀공작을 밝힌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가 폭로되면서 미국 정치의 기만이 확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펜타곤 페이퍼>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비르투스와 포르투나 ‘비르투스(Virtus)’라는 라틴어는 ‘미덕(美德)’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virtue’의 뿌리가 되는 말이다. 전쟁을 통해 국가의 힘을 확장했던 고대 로마에서 비르투스는 우선 전사(戰士)의 주력부대일 수 밖에 없는 남성들의 “용기”를 뜻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에 대한 용기였을까? <로마사 논고(論考)>를 쓴 마키아벨리는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군주론>을 썼는데 그가 돌파하려 했던 것은 “운명”이었다. ‘포르투나(fortuna)’라고 불린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진 경로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었고, 용기는 이와 대결해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자질(qualita)’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따라서 바로 이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제왕학(帝王學)이었다. 1469년에 태어나 1527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았던 당대의 이탈리아는 외세에 휘둘려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민중들의 삶은 따라서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고 재난이 겹치면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한 폭정”에 시달렸다. 그러니 이탈리아의 독립과 그에
-문맹률 80프로의 사회와 군부 쿠데타 옹호론 광주학살로 권력을 움켜쥐고 대통령까지 한 어느 인물이 세상을 뜨자 난데없이 ‘국장(國葬)의 예’를 받았다. 시민사회는 애도의 개인적 차원이야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런 결정은 ‘촛불정부의 자기배반’이라고 비판했고 철회를 요구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처사였고 두고두고 곤경에 처할 역사적 평가의 논란을 자초했으며 정당화하기 어려운 흠결로 남고 말았다. 더군다나 이 국장의 자리에서 그의 치하에 국무총리를 지냈던 인사가 다음의 말을 추모사로 대신했다. 그는 정치학자 출신이기도 하다. “(정규육사 1기생들에게) 한국 정치는 국방의식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인식되었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통치기능에 참여하는 계기였다. 이들은 국민의 문맹률이 거의 80%에 해당하던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현대 문명을 경험하고 한국에 접목시킨 엘리트들이었다.” 문맹률 80 프로의 무지한 한국사회에서 가장 선두에 선 엘리트 집단의 불가피한 통치행위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과 군사 쿠데타는 역사적 합리성을 획득하고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결단한 위대한 정치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책임은 절
-정몽주의 주체의식 상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해나 평가는 미처 짚지 못한 것들이 있을 때 어느 한 단면이 전체로 전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인물평이라는 것은 이런 한계에 갇히는 수가 적지 않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처 몰랐던 진면목이 드러나면 감탄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놀라 아연실색(啞然失色)하는 경우 또한 있게 된다. 가령 고려(高麗)의 국체를 지키면서 개혁하겠다는 정몽주는 조선 개국에 협력하지 않자 선죽교에서 격살당한 뒤 절조(節操)있는 충신의 표본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런데 그가 원명(元明) 교체기에 명나라 옷을 입고 명나라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지극히 사대주의적 인물이었다는 점을 안다면 우리의 판단은 좀 다르게 된다. 그는 당대의 대유학자임에도 주체적 자아에 대한 각성이 세워지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말은 몽골 제국의 본령(本領)인 원과의 관계에서 유라시아 교역로가 제공하는 문명의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누리면서 나름의 주체성을 지켜내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족(漢族)의 입장에서는 이민족(異民族)인 몽골의 지배가 퇴조기에 들어서자 유학의 본가가 다시 부흥했다고 여기고 중화주의(中華主義)에 매몰된 지식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