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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망명객이 된 혁명, 그 패배의 골짜기를 지나

[갑신혁명의 길 3/ 최종회]

 

 

-자객 그리고 암살

 

 

1894년 3월 28일 오후 두시 경,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여관 동화양행(東和洋行) 2층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 소리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은 그저 축제에 쓰이는 폭죽(爆竹)이 터지는가 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숙박 명부에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라고 적힌 인물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본명은 김옥균(金玉均). 갑신혁명의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쏟아져 흘러내렸다.

 

 

10년 망명(亡命)의 한(恨)을 뒤로 하고 동양 3국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보려 했던 풍운(風雲)의 혁명가 고균(古筠) 김옥균의 절명(絶命)이었다. 그가 숙박부에 적은 이름 산와(三和)는 훗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 씨를 뿌린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일컫는 것으로, 한때 그의 적수(敵手)였던 청(淸)의 리홍장(李鴻章)과 담판을 지어 실현해보려 했던 동아시아의 미래상이었다.

 

그의 상하이 행을 말리던 이들에게 고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간 만사 운명이 아니겠는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 가서 죽음을 당할는지 유폐(幽閉)의 처지가 될는지 모르나 단 5분이라도 리홍장과 담판을 지을 기회가 온다면 리홍장은 내 것이다.”

 

 

담력과 배포가 당찼던 그도 암살의 기미를 알아차렸지만 자신을 너무 과신했던지 결국 홍종우(洪鍾宇)의 격발(擊發)을 피하지는 못했다. 돌아보면 그의 목숨을 겨냥했던 암살자들이었던 장갑복, 지운영 등의 칼끝이 실패로 돌아갔던 바가 있다. 그를 노린 세력들로서는 마침내 성공한 셈이고 ‘3일천하’ 이후 김옥균과 함께 망명객(亡命客)의 신세가 되었던 갑신혁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목숨이 끊긴 김옥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가 만나려던 리홍장에 의한 조선 호송이었다. 리홍장은 이렇게 사건을 정리했다. “김옥균은 조선의 반역자이며, 홍종우는 조선의 관원(官員)이다. 그러므로 시체와 홍종우는 마땅히 조선으로 인도하라.” 청의 군함에 실려 간 그의 시신(屍身)은 또 한 차례의 참혹한 지경을 겪는다. 그건 한강의 나루터 양화진(楊花鎭)에서 “대역부도죄인옥균(大逆不道罪人玉均)”이라는 팻말이 걸린 ‘능지지형(凌遲之刑)’이었다. 온 전신(全身)이 잘려 여기저기에 버려졌다.

 

 

그의 정적(政敵) 민씨 일족은 축하연을 베풀었고 대외관계의 국정철학은 달랐으나 자주(自主)노선의 견지, 부패한 세도가(勢道家)들의 특권타파에는 김옥균과 그 뜻이 일치했던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조용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혁명의 실패로 겪은 참극(慘劇)은 이미 그 이전에 처절하게 펼쳐졌던 바 있다.

 

-혁명실패의 참극과 망명의 고독

 

혁명실패로 덮쳐온 보복은 잔혹했다. 관련자 가족들은 모조리 연좌(連坐)되었다. 혈족의 위치에 따라 교수형, 재산몰수, 노비신분의 전락(轉落)으로 이어졌다. 하인들까지도 처벌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혁명주역의 가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다반사였다. 김옥균의 생부(生父) 김병태는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고 천안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김옥균이 암살되고 두 달 뒤 1894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모친은 남편이 체포되자 딸과 함께 극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그의 부인 유씨는 딸을 안고 겨우 도주하여 숨어지냈다.

 

우정국(郵政局)의 책임자로 갑신혁명 현장을 지휘했던 홍영식의 아버지는 손자, 며느리와 함께 음독자살을 했고 박영효의 집안 역시도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었다. 그의 형 박영교는 홍영식과 함께 혁명실패의 과정에서 살해되었고 아버지 박원양은 박영교의 아들인 그의 손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서광범의 아버지 서상익은 감옥에서 8년 수감되었다가 옥사(獄死)했으며 서재필의 부모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역자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던 이들의 집단 자결(自決)이었다. 그 밖의 관련자들은 중죄인으로 가혹하게 심문당한 끝에 엄벌에 처해졌다.

 

김옥균이 암살당한 현장에 끝까지 함께 했던 이는 청년 와타 노부지로(和田廷次郞)였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는가?

 

 

김옥균은 일본에 망명객으로 있으면서 내외의 관심을 온통 받는 유력 명사가 된다. 그를 뛰어난 혁명가로 받드는 이들도 그의 주변에 운집(雲集)하면서 그의 존재는 내정(內政)과 함께 국제적으로도 일본 정부에게는 부담이 되기 시작하자 일본에서 7일이나 해상(海上)으로 가야 간신히 도달하는 태평양 제도의 하나인 오가사하라(小笠原) 섬으로 보내버린다. 일본 망명 2년째 되던 1886년의 일이었다.

 

그 시기 고균은 미국 망명을 꾀하려 했으나 자금이 마련되지 못했던 처지였다. 그런 그에게 오가사하라행(行)은 추방과 유배를 뜻했다. 훗날 유길준도 잠시 이곳에 유배되었던 역사가 있었으니 우리의 근세사에 이 섬이 가진 사연은 새롭게 주목해볼 일이다. 언제 되돌아 올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채로 그 멀고 먼 태평양의 섬 오지(奧地)까지 내몰렸던 선조들의 내면에 어떤 감회의 기록들이 있었을까 상상해보면 좌절의 깊이를 넘어선 이들의 용기와 의지가 놀랍기만 하다.

 

무인도나 다름없는 아열대 제도(諸島)의 하나인 이곳에서 김옥균은 낙담하지 않고 사람들과 사귀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장차 다가올 동양 정세의 대변화를 내다보는 가운데 그의 ‘삼화주의’를 다듬어 나갔다. 바로 이곳에서 그를 따르던 소년이 상해의 암살 현장에 있던 와타 노부지로였다. 그의 존재는 김옥균이 상대의 신분과 처지를 구별하지 않고 친구처럼 사귀는 힘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아도 혁명이 실패하면서 체포되어 국문(鞫問)을 당하는 김옥균 집안의 하인 이점돌(李點乭)은 그저 하인이 아니라 혁명동지의 한 사람이었다. 인민평등권(人民平等權) 사상을 내건 혁명가의 삶다운 모습이 여기서 드러난다.

 

오가사하라 억류 생활 3년이 지나면서 김옥균은 풍토병으로 고생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완전히 기후가 다른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札幌)으로 이송된다. 폭염의 땅에서 혹한(酷寒)의 땅으로 극과 극을 체험하게 된 셈이었다. 그의 삶 자체를 그대로 보여준 유배생활이었다.

 

-청의 조선 속방화정책

 

혁명 자체가 망명자의 신세가 되었던 그 시기,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다름 아닌 ‘조선-러시아 밀약설’에 따른 청(淸)의 내정간섭 강화였다.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청은 대조선 정책의 방향을 ‘속방화(屬邦化)’로 결정하게 된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하고 청의 종주권 또는 주도권을 공식 확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청의 한 성(省)이 되도록 하는 결정이라고 하겠다. 과거 전통적인 사대관계가 암묵적인 방식이었다면, 국제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내놓고 밀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조선 또는 조선의 다른 이름인 고려는 중국의 속방이라는 이른바 “고려위중국지속방(高麗爲中國之屬邦)”을 내건 정책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청은 조선이 대외관계를 맺으려 하면 중국에 대한 보고와 승낙을 요구했다. 1882년 청과 조선이 맺었던 통상 조약인 “조중상민수륙물자장정(朝中商民水陸物資章程)”은 그 전문(前文)에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것을 명시토록 했으며 속방이기에 주권국가나 쓸 수 있는 ‘조약’이라는 단어는 쓰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장정(章程)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규정(規定)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일방적 규칙에 따른다는 의미가 된다. 민씩 일족의 세도정치는 이런 청에 대해 종속과 굴복을 댓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특권과 사대굴종 체제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모순과 억압에 분노해서 일어난 것이 임오군란이며 이를 통해 보다 본질적이고 전격적인 대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 이들이 갑신혁명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갑신혁명은 그 시기, 청의 주도권이 일본보다 우세한 현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실패했고 그 결과 체결된 천진조약(天津條約)은 청과 일본의 공동출병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냈으며 훗날 청일전쟁(淸日戰爭)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886년 불거진 조선-러시아 밀약설은 그 전해인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이뤄진 영국의 거문도 불법점령이라는 현실과 맞물려 청에게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령이 발동되는 형국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의 러시아 접근 움직임에 대해 청에게 밀고한 것이 민영익이었는데 그는 이 말을 들은 원세개가 고종폐위까지 논하자 자신의 권력기반이 아예 무너질 것에 기겁, 이를 다시 조정에 알려 대응책을 찾도록 만든다.

 

 

원세개의 계획은 이러했다.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 방화해서 이를 민씨와 왕에게 뒤집어 씌우고 이에 대한 진압을 명분으로 내세워 왕궁을 습격, 왕을 포로로 해서 상황을 제압한 뒤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형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대원군의 섭정을 재가동하면서 조선을 청에 병합한다. ”나라가 자주의 기틀을 굳건히 세우지 못하면 겪을 비극적인 사태였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갑신혁명의 의미는 너무나도 명백했던 것이다. 원세개의 이러한 계획은 조선 조정이 납작 엎드리면서 미봉(彌縫)이 되었고 대신 오늘날의 주한대사(駐韓大使)격인 주한변사대신(駐韓辯事大臣)으로서의 원세개의 조선에서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말하자면 그는 조선에 주둔하는 청의 총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세개의 직속상관 리홍장이 대외관계의 다변화를 기도하고 있던 고종의 편지(대국에게 올린다는 뜻으로 상서/上書라고 했음)에 대해 답하는 바, 고종의 편지는 “조선국왕 이희(李熙)는 삼가 상서(上書)하노니 사신(使臣)을 서양각국에 파견할 것을 윤허(允許)해주시옵소서.”라고 되어 있었다. 이에 리홍장의 답신은 아래와 같았다.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므로 중국의 승인 없이는 외국에 사절을 파견할 수 없다. 1. 조선공사가 만일 외국에 주재할 경우 대청공사(大淸公使)를 먼저 방문한다. 2. 기타 집회에서 조선공사는 반드시 대청공사의 하석(下席)에 앉을 것 등.”

 

- 불멸의 역사를 향해

 

이런 식의 굴욕적인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때 김옥균이 고종을 설득하여 차관외교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갔으나 민씨 일족과 묄렌도르프는 김옥균이 지닌 왕의 신임장은 가짜라고 모함하여 차관외교를 실패로 돌아가게 했던 일도 있다. 또한 이후 망명객이 된 그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내는 일이 이어졌으니 갑신혁명의 충정은 역심(逆心)으로 몰리고 고균은 이에 대해 망명지 일본에서 고종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낸다.

 

“오늘날의 천하는 옛날의 천하와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민씨성을 가진 자들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뜻을 가진 자 과연 몇이나 되옵니까? 모르긴 하오나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죄인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물리치지 않으시면 폐하로 하여금 망국(亡國)의 군주(君主)가 되게 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어떤 계책이 있으시기에 망국의 군주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하시옵니까? 문벌을 폐하고 인재를 골라 쓰시고 널리 학교를 세우십시오.”

 

그러면서 놀라운 제안을 한다.

 

“대원군은 천하의 형세에 통달하지 못해 전에는 그 완고한 거동이 있기는 했으나 오늘날에는 이미 그것을 후회하고 있으니 민심이 허락하는 바이라면 원컨대 한번 그에게 국가의 전권을 맡기시고 혹 과실이 생기면 폐하께서 다시 주권을 잡아 이를 고치시면 됩니다.”

 

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조선의 왕조는 이름은 그럴싸하게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내세웠으나 결국 패망했고 식민지의 비통한 역사를 겪고야 말았다.

 

혁명이 실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보복을 당하기 마련이고 이는 당연히 각오해야 할 바이다. 패자에게 주어질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애초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건 불멸(不滅)의 역사가 된다. 비록 미숙한 바가 있었고 정세판단의 오류가 있었으며 준비의 철저함이 부족했다 해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정세를 마주하면서 나라의 미래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이들의 존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눈부시다.

 

갑신혁명(甲申革命)의 족적(足跡)은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조선 혁명사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세계정세를 꿰뚫어 보면서 ‘자주와 개혁’의 깃발을 포기하지 않는 위대함을 그 혈맥(血脈)이 되게 했다. 그것은 자객(刺客)의 흉탄(凶彈)으로 멈추게 할 수 없는 힘이다. 조건이 열악했음에도 분연히 일어섰던 소수 엘리트의 봉기가 농민이 주체인 인민(人民)의 봉기로 이어진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그 성과를 제도로 만들어낸 갑오개혁 그리고 이어지는 일체의 항쟁은 모두 망명객이 된 혁명을 자기 땅으로 다시 불러들여 되살아나게 하려는 역사의지다.

 

오늘날 또 다른 격동의 지진 소리가 들리는 동아시아의 현실 속에서 패망의 기운을 몰아내고 이 시대의 과제인 분단을 넘어선 대혁명의 길을 우리는 고뇌하고 풀어가야 한다. “전하께서는 어떤 계책이 있으시기에 망국의 군주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하시옵니까?”라는 고균 김옥균의 음성이 들린다. 오늘의 전하, 군주는 바로 우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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