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바람에 새벽비 뿌리더니 새가 떨어졌다. 장산곶에서 날아오른 매가 지친 날개를 접었다. 밖에서는 수리와 겨루고 안에서는 구렁이와 싸우던 장산곶매가 날갯짓을 멈췄다. 황망한 소식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황망함을 아들에게 전했지만, 내 아들은 백기완 선생을 몰랐다. 선생을 모르는 대학생 아들과 밥상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돌아설 때, 비로소 선생의 부고(訃告)를 절감했다. 아, 선생이 가셨구나. 가셔도 벌써 가시고 이 세상에 없었구나.
아들아, 고백하건데 아비는 백기완 선생을 오래도록 흠모했다. 너에게 조언했던 여러 말들 또한 선생의 책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비가 선생을 처음 안 것도 너처럼 대학시절이었다. 국어순화론자인 선생의 우리말 사랑 덕에 ‘새내기’가 되어서 ‘동아리’ 활동도 하였다. 학우들과 함께 어깨 걸고 불렀던 ‘님을 위한 행진곡’도 선생이 쓴 시 ‘묏비나리’가 모태였다. 그런 이유로 당연히 너도 선생을 알고 있을 거라 착각했다. 네가 살아내고 있는 스무살과 아비가 살아냈던 스무살이 다르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비들의 세대가 군부독재와 맞서 싸울 때, 너희들의 세대는 스펙과 취업의 벽에 맞서 싸운다는 걸 잠시 잊었다. 아비들의 세대가 민주주의를 부르짖을 때, 너희들의 세대는 ‘영투빚끌’의 유혹을 견디며 암울한 현실과 싸운다는 걸 잠시 잊었다. 아들아, 못난 아비의 잘못이다. 김구 같은 인물은 더 이상 없다고, 현실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고 네가 말했을 때,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한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노라고 말했어야 옳았다. 그 사람이 백기완 선생이라고, 선생이 남긴 책 한 권 쯤 손에 쥐어줬어야 마땅했다.
아들아, 백기완 선생은 이 땅의 아픈 역사다. 조부 백태주는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다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옥사했다. 백범 김구 선생 또한 일제의 추적을 피해 조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런 인연으로 백기완 선생은 일찍부터 백범을 따랐다. 유신체제와 군사정권시절에는 독재에 맞서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그때마다 고문을 당했는데, 권총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맞거나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두들겨 맞았다. 잡혀갈 때 82kg였던 몸무게가 나올 땐 38kg에 불과했다.
그렇게 일궈낸 민주주의다. 하지만 선생은 민주화운동의 경력을 계급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도권 정치판에 합세하기 위해 야합하지 않았고, 권력과 결탁하여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선생이 서고자 한 자리는 늘 약한 사람들의 곁이었다. 용산 참사의 현장이었고, 김진숙에게로 향하는 희망버스였고, 세월호의 진실을 건져 올리기 위한 농성장이었고, 촛불로 불타오르던 광화문광장 한복판이었다. 그런 선생이 생을 마감했다.
아들아, 우리는 시대의 양심 하나를 오늘 잃었다. 서럽고 힘없는 자들을 대신해 하늘에 대고 울어줄 장산곶 매를 잃었다. 어둡고 설운 땅에 사는 자들이 기댈 어깨 하나를 잃었다. 영영 잃어버려서, 빈자리를 지켜야 할 자들의 슬픔은 절로 기가 막힐 것이다. 아들아, 이번만큼은 아비와 함께 선생의 빈소를 찾아 설움을 함께 나누자. 빈소 가득 흘러넘칠 설움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게 사람다운 것인지 생각해보자. 학점과 상관없이, 기말고사에도 나오지 않을 문제를, 아비와 함께 풀어보자.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고,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