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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25년의 영화사랑, 그 연애편지

④ 라스트 레터 - 이와이 슌지

일본 최고의 로맨틱 가이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신작 ‘라스트 레터’는 그의 전작(前作)인 ‘러브 레터’를 보지 못한 신세대 관객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극 중 인물들이 (시대가 어느 때라고) 매일같이 ‘손편지’를 주고받는 내용이어서 ‘꼰대 영화’라는 소리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의 전작(全作)을 대체로 봐왔던 사람들, 특히 ‘뱀파이어’(2011)나 ‘립 반 윙클의 신부’(2016)까지 봐왔던 사람들은 ‘라스트 레터’가 결코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작품들을 넘어 이와이 슌지 자체를, 그래서 흔히들 ‘이와이 월드’란 말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번 새 영화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숨은 그림을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가장 쏠쏠한 맛이다.

 

복잡한 척 하지만 ‘라스트 레터’는 사실 그리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앞뒤, 그리고 중간중간 시간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주인공 토노 유리(마츠 다카코)의 시어머니가 늙으막에 연애를 하다 허리를 삐긋한다든지, 극중에서 소설가로 나오는 오토사카 쿄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가 그의 이전 여자 토노 미사키의 옛집을 찾아 가 그녀의 전남편 아토(토요카와 에츠시)와 이제는 그와 동거하는 여자 사카에(나카야마 미호)를 만난다든지 하는 것 등등 모두 일종의 맥거핀이다. 맥거핀. 눈속임 장치. 본래 얘기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앞에 깔아 놓은 주단 같은 이야기. 알고 보면 편집해서 없애도 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니 그런 거 다 빼고 영화의 기둥 줄거리를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으면 좋다.

 

 

‘라스트 레터’는 25년간 한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작가 오토사카는 고등학교 때 만난 미사키(히로세 스즈)와 대학 때 잠시 같이 살듯이 연애를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그녀는 폭력적인 남자 아토를 선택해 결혼한다. 미사키는 아토와의 사이에 딸 아이 아유미(히로세 스즈)를 낳았지만 폭력남편을 피해 도망 나오고 그렇게 평생을 행복하지 못한 채 살다 죽는다. 행복하지 못했던 건 오토사카도 비슷한데 그는 젊은 시절, 그녀와의 연애담을 소재로 ‘미사키’라는 소설을 썼고,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그래서 어쭙잖은 상도 타고 그러긴 했지만, 그 이후 단 한 권도, 아니 단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살아왔다.

 

글을 쓰긴 했어도 데뷔작인 ‘미사키’의 범주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두 번째, 세 번째 책으로 묶어 내지 못했다. 오토사카는 평생을 미사키의 존재와 그녀와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런 남자는 대개가 다 대체로 불행하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거나 하지 못한다. 오토사카가 처한 극 중의 상황, 바로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이자 키워드가 된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오래전 ‘이와이 월드’의 시티즌이었던 사람들은 그가 지금껏 매우 다양한 영화들을 여러 편 만들어 오며 영화예술적으로 종횡무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같은 숨겨진 걸작을 만들어 왔으며 ‘립 반 윙클의 신부’ 등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영화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인물인가를 드러내 왔다. 이와이 슌지의 세계관은 상당히 비관적이며(그의 영화 속 아이들 상당수가 어릴 적 이지메를 당하는 등등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따라서 영화들도 알고 보면 매우 ‘다크’한 측면을 지닌다. 그렇게 그는 지금껏 자신의 영화 세계를 비교적 잘 구축해 왔다.

 

그러나 그건 보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이와이 슌지 자신, 그 스스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이번 신작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평생을, 극 중 인물인 오토사카가 ‘미사키’라는 소설 한 권 이후 제대로 된 작품을 못 써 온 것처럼, 자신도 초기작인 ‘러브 레터’의 성공 이후, 제대로 된 영화와 제대로 된 영화 흥행을 해오지 못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뼈아픈 자각을 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부분에서 이와이 슌지와 주인공 오토사카는 일치된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영화 속 남자 오토사카를 넘어 이와이 슌지에게 동일시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군. 저 자(者)도 괴로운 심연으로 살아왔군, 젊은 시절 한때의 성공을 넘어서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면서 살아왔군, 그게 잘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트라우마를 슌지 역시 앓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된다. ‘라스트 레터’는 이와이 슌지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영화적 자서전 같은 작품이자 우리 모두의 숨겨진 일기 같은 영화이다.

 

 

오토사카가 이와이 슌지 자신을 얘기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영화는 여러가지가 ‘훅’ 들어온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왜 일본 혼슈(本州) 미야기현의 센다이 시(市)인지도 알게 된다. 센다이는 이와이의 고향이다. 자신의 얘기를 하려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종의 귀소(歸巢) 본능인 셈이다. 오토사카가 미사키를 왜 25년간 사랑해 왔는지도 알게 된다. 이와이 슌지가 ‘라스트 레터’를 만든 2020년은 ‘러브 레터’를 만든 지 딱 25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극 중 인물들이 왜 그렇게 엇갈리는 손편지를 주고받는지도 이해가 간다. 이건 ‘러브 레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와이 슌지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러브 레터’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가 이번 영화에서 단역으로 나오는 것, 심지어 ‘러브 레터’에 나왔던 코요카와 에츠시가 이번 영화에서 미사키의 나쁜 남자이자 전 남편인 아토로 나오는 것도 심상치 않다. 이와이 슌지에게 있어 전작인 ‘러브 레터’는 이제 나쁜 기억 혹은 아픈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영화 ‘라스트 레터’의 사실상 주인공 토노 유리, 곧 미사키의 여동생 역으로 마츠 다카코가 캐스팅된 것은 그녀가 슌지의 또 다른 히트작 ‘4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와이 슌지는 이번 영화로 자신의 최고 히트작인 ‘러브 레터’의 동어 반복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에 대한, 자신의 영화적 초심(初心)과 영화에 대한 오래고 오랜 뜨거운 사랑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그 노력이 왠지 눈물겹다.

 

극 후반에 오토사카는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여자 미사키의 딸 아유미와 반대로 자신을 평생 흠모하고 짝사랑했던 미사키의 여동생 유리의 딸(모리 나나)을 아날로그 스틸 카메라로 한 컷에 담는다. 두 아이는 사진 속에서 각자 우산을 들고 아주 적당한 사이를 둔 채 밝고 포근한 분위기로 서 있다. 마치 이와이 슌지가 자신의 예전 영화 ‘러브 레터’와 새 영화 ‘라스트 레터’가 그렇게 서 있기를, 그렇게 공존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와이 슌지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진다. 영화 좋군요. 맞아요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만나야죠. 그렇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죠. 걱정마시길. 지금까지처럼만 영화를 만드시길. 영화감독이 매번 걸작과 흥행작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란 점을 받아들이시길. 끝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면 결국 모든 것이 소통될 것이라는 점을 믿으시길. ‘라스트 레터’는 슬픈 연가이다. 한 영화감독이 25년간 영화를 사랑해 왔음을 고백하는 이야기이다. ‘라스트 레터’를 보면서 마음이 촉촉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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