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7 (금)

  • 구름많음동두천 22.6℃
  • 구름많음강릉 27.2℃
  • 구름많음서울 24.4℃
  • 구름조금대전 24.7℃
  • 맑음대구 27.1℃
  • 구름조금울산 25.1℃
  • 구름많음광주 24.7℃
  • 구름조금부산 21.9℃
  • 구름조금고창 ℃
  • 구름많음제주 23.3℃
  • 구름많음강화 20.0℃
  • 맑음보은 24.2℃
  • 구름많음금산 24.7℃
  • 구름조금강진군 24.0℃
  • 구름조금경주시 27.7℃
  • 구름조금거제 20.6℃
기상청 제공

[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두 여인의 사랑. 세상을 혁파하다

⑧ 암모나이트 - 프란시스 리

 

영화와 여성은 늘 조용한 혁명을 이루어 왔다. 이 둘은 때론 같이, 혹은 때로는 따로 세상의 금기를 깨뜨리는데 앞장서고 투쟁해 왔다. 여성을 해방시키는 나라는 영화와 창작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둘은 종종 무지하고 막지한 보수의 벽에 부딪히곤 한다. 영화 ‘암모나이트’는 그러한 반동(反動)의 시대를 겨냥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 프란시스 리는 두 여인의 섹스신을 강도높게 구사한다. 당연히 의도적이다. 프란시스 리는 보수화되고 있는 유럽사회에, 그리고 한국 사회에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 한다. ‘정말 아름다운 게 뭔지 보여줄까?’ 두 여인의 나신(裸身)은, 사람 간의 진짜 사랑은 성(性)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은 꼭 남자와 여자만이 사랑을 하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신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남자든 여자든 그냥 상대인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을 것이다.

 

‘암모나이트’는 그 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다. 이성애와 동성애가 무슨 차이람. 그 차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담. 굳게 닫힌 듯 보이는 세상의 문은 영화 한편이 열어젖힌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슬며시. 그렇게 문 바깥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한다. ‘암모나이트’는 바로 그런 영화다.

 

제목인 ‘암모나이트’의 뜻은, 그렇다. 바로 그 암모나이트다. 중생대의 생물. 연체동물이다. 달팽이 같이 생겼다. 그 작은 공룡 화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쥐라기가 중생대이다. 그러니까 암모나이트는 그것이 발견되는 지역의 연원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 공룡시대의 연구에 시금석 같은 자료가 된다.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이 굳이 암모나이트인가. 오래 전에는, 그러니까 약 200년 전에는 이 암모나이트가 일종의 유희였다. 화석은 관광지 가게에서 팔고 사는 기념품과도 같았다. 그러다가 매우 정교하고 모양이 제대로 갖춰진 화석이 발견되면 고생물 연구에 활용됐다. 이 영화의 주인공 메리 에닝(케이트 윈슬렛)이 바로 그 고생물 연구자다.

 

그런데 여자라는 이유로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설적인 명성만 자자한데 영국의 남자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소문이 돌아 있는 모양이다. ‘화석을 주으며 살아가는 여자가 있대. 가끔 놀라운 발견을 하는 가봐. 별일이지?’ 그래서 뛰어난 모양의 암모나이트를 발견했음에도 대영박물관에는 메리 에닝의 이름 대신 그녀에게 그걸 산 남자의 이름이 기증자로 걸려 있다. 200년 전에는 이런 식이었다. 사회가 화석과 같았다. 바위 속에, 돌멩이 속에,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들이, 그렇게 갇혀 살았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남부의 해변 마을 라임 레지스(Lime Regis)이다. 당연하다. 이곳은 아직도 쥐라기 코스트(coast)라 불릴 정도다. 지금은 매우 팬시(fancy)한 해안가로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지만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1840년에는 그냥 평범하고 외진 해변 마을에 불가했다. 물론 이때부터도 관광객이 존재했다. 메리 에닝이 젊은 여인이자 유부녀인 샬럿 머치슨(시얼샤 로넌)을 만나게 되는 것도 순전히 그녀의 남편이 딜레탕트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화석 연구가 취미인, 비교적 부유한 남자이고,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라임 레지스에 왔지만 사실은 ‘전설의’ 메리 에닝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샬럿은 얼마 전 아이를 얻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산을 했거나 아니면 낳고 잃은 것으로 보인다. 샬럿은 우울증에 시달린다. 무엇보다 사랑에 목말라 있다. 남편이 안아 주기를 바라지만 경직된 사회의 우둔한 남자들은 육욕이 죄악인 양 군다. 치사하고 비겁하고 용렬(庸劣)하다. 위선적이다. 남자는 (정신이) 아픈 여자를 메리 에닝에게 떠넘기듯이 안기고 자기 길을 간다. 학회에 가겠다며. 길어야 6주만 맡아 달라며. 메리와 샬럿은 그렇게 만난다. 운명의 관계는 때론 원치 않는 것처럼, 그러지 않은 척 다가선다. 그리고 불길을 만들어 낸다.

 

메리 역시 상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연구와 발굴(생계용 채석)을 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지만 그걸 숨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에게는 예전에 가까웠던 연상의 여인(피오나 쇼)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둘은 끝내 함께 하지 못한 관계다. ‘그 여인’은, 나이가 많은 만큼, 늘 인자하고 인내하는 표정으로 메리에게 얘기한다. “정말 들어 와서 차 한잔 하고 가지 않을래?” 그때마다 메리의 몸과 얼굴 표정은 따로 논다. 몸은 들어가고 싶지만 표정은 차가워진다. 그리고 결국 돌아선다. 여인은 슬퍼한다. 메리 역시 가슴에 늘 사모(思慕)의 상처를 안고 산다. 사랑의 슬퍼지면 삶이 힘들어진다. 메리의 삶이 그렇다.

 

그렇게 중년이 된 메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샬럿이 출현한다. 시인 마리아 라이너 릴케의 얘기처럼 사랑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금방 뜨거워진다. 어쩌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하루면 되거나 순간이면 된다. 가벼운 키스로 시작해 농염한 섹스로 이어진다. 둘은 메리의 작은 침대에서 서로의 은밀한 부위를 탐하며 세상을 얻는다. 육체의 환희는 정신적 고통따위를 저 세상으로 던져 버리게 한다. 육체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그렇게 세상을 얻는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사랑이 없이는, 마음이 동하지 않고서는, 상대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들의 섹스는 말 그대로 진심의 향연이다. 진심의 열정이 교환되는 베드신은 늘 그렇지만 아름다운 법이다.

 

영화 ‘암모나이트’는 같은 계통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비해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간 작품이다. 이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데 ‘타오르는’은 여성 감독의 작품이고 ‘암모나이트’는 남성 게이의 작품이다. 결의 차이는 아마도 거기서 생겼을 것이다. 한 보 더 깊어 보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해안과 바닷물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샬럿이 혼자서 해수욕을 한다고 했을 때 바다는 그녀를 거칠게 밀어낸다. 샬럿은 파도에 치이고 맞는다. 당연히 그녀는 물에 들어간 후 병이 걸리고 그 병이 메리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병이 다 낫고, 둘이 사랑과 섹스를 한 후에, 바다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들인다. 밀어내지 않고 샬럿을 둥둥 뜨게 한다. 메리가 그녀를 물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둘은 물 안에서 포옹하고 키스한다. 바닷물은 세상이다. 여자 혼자일 때는 매정하고 못되게 밀어 내지만 사랑하는 둘이 같이 하면 그러지 않는다. 세상은 연대함으로써 이겨내는 것이다. 바다에서의 둘의 키스가 그렇게나 예쁜 이유다.

 

‘암모나이트’는 차별금지법 논란이 일고 있는 우리사회에 의미심장한 러브 스토리 영화이다. 동성애를 마치 무슨 질병인 양, 정신병인 양 취급하는 기독교 보수 교단의 목사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 같은 영화이다. 정치적 주장은 이렇게 예술적이어야 한다.

 

케이트 윈슬렛의 살찐 등판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다. 케이트 윈슬렛은 영국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8년작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에서도 이미 농염하면서도 슬픈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무려 십수년의 시간이 흘렀고 몸과 마음은 그 세월에 많이도 녹아 내렸지만 신체적 매력은 오히려 더 풍만해졌다. 좋은 배우이다. 그녀가 선택한 ‘암모나이트’도 그렇다. 좋은 영화가 좋은 여배우를 만드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좋은 여배우는 좋은 영화를 만든다. 늘 그런 법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