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73)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에 연루돼 기소된 이규진(59)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이민걸(60)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3일 1심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관련 첫 유죄 판결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 윤종섭)은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상임위원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이 전 실장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2016년 양 전 대법원장 등과 공모해 강제해산된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들의 지위확인소송에 개입하고, 헌법재판소 견제 목적으로 헌재 파견 법관을 통해 헌재 내부 정보를 수집한 혐의를 받아 왔다.
이민걸 전 기조실장은 통진당 의원들의 행정소송에 개입하고,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하는 법원 내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권과사법제도소모임을 와해시키려 한 혐의(직권남용)다.
재판부는 이 두 사람은 모두 혐의가 인정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헌법과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특정사건 핵심영역을 지적하는 사무를 수행할 수 있다”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 재판 개입을 시도할 사법행정권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직업적으로 충분히 단련되지 못한 법조인이 판사가 되는 이상 심급 제도나 입법 제도만으로 부족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며 “이런 일이 적게 일어나도록 특정사건 핵심영역 지적 사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권한을 남용해 권고 이상 행위를 하게 하면 해당 판사는 인사권 등도 염두에 두기 마련이라, 권고를 제쳐두고 사무를 수행하는 게 어려워 사실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이 전 상임위원이 2015년 2월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 지시를 받아 헌법재판소 견제를 위해 파견 법관을 활용해 헌재 내부 정보 등을 수집한 직무집행을 했다고 봤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헌재 파견 판사가 심판이 계속 중인 사건에서 헌법 연구관의 의견을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보고하거나 문건을 전달하는 것은 법에 반하고 파견 취지에도 반한다”며 “이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 전 상임위원이 문건들을 파견 법관에게 요청한 것은 직권행사 모습을 갖췄다”면서 “임 전 차장의 파견 법관에 대한 요청은 직권남용에 해당하고, 이 전 상임위원은 임 전 차장의 직권남용 행위에 가담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양 전 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처장 역시 파견 법관을 이용해 헌재 내부 정보 등을 수집하는데 공모했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이 전 실장이 2016년 사법부 정책 추진 협조를 얻고자 당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박선숙·김수민 국민의당 의원 등의 보석 허가 여부 및 재판부의 유·무죄 심증을 알려달라며 부탁한 직권남용 혐의도 유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은 직권에서 벗어나 보석 허가 여부와 유·무죄 심증을 파악해보라는 위법 부당한 지시를 해 당시 심의관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며 “이는 재판부 공정성에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재판 영향 행위”라고 말했다.
또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이 2015년 7월 사법정책에 반대하고 법관인사 제도 문제점을 지적하는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그 소모임 인사모 활동을 저지하고 연구회를 와해시키려 직권을 남용했다는 혐의도 유죄라고 봤다.
하지만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이 옛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1·2심과 상고심 재판에 개입한 혐의와 옛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행정소송 1심에 개입한 혐의는 무죄라고 판단했다.
이와 더불어 이 전 상임위원이 헌재를 견제하고 사법부 위상을 강화하고자 매립지 등 귀속 관련 사건이 조기에 선고될 수 있도록 재판에 개입한 혐의 역시 무죄 판단이 내려졌다.
아울러 ‘한정위헌’을 구하는 취지의 위헌제청결정 사건 관련 결정문을 헌재에 그대로 송부하지 않고 법원행정처 입장에서 유리하게 변경하도록 하고, 이를 은폐하고자 일명 ‘블라인드 처리’한 혐의도 범죄 증명이 안 됐다고 봤다.
재판부는 양형 사유를 밝히며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의 재판 개입 범행이 중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인사모를 장애물로 여긴 임 전 차장 동기를 알고 있었다”며 “나아가 재판장 심증을 확인해달라는 위법한 지시를 했다. 이는 재판사무 공정성에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범행”이라고 했다.
다만 “이 전 실장이 개인적 추구를 위해 각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면서 “주무실장이긴 했지만 사법행정조직 계통에 비춰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결국 시행은 임 전 차장이 했다”고 밝혔다.
또 이 전 상임위원에 대해서는 “헌재 파견 판사로 하여금 정당한 직무범위를 벗어나게 했다”며 “위 각 범행은 어느하나 뺄 수 없이 중대하고, 이 전 상임위원도 스스로 판사면서 재판권 행사 방해를 시도한 것은 불리한 정상”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이 전 상임위원 역할·책임이 가볍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각 범행 지시는 임 전 차장이 한 것”이라며 “이 전 상임위원은 법원 조사와 수사, 재판에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 했다”고 양형 사유를 말했다.
재판부는 다만 법원행정처 부탁을 받고 통진당 소속 의원의 지위확인소송 항소심을 특정 재판부에 배당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았던 심상철(64) 전 서울고법원장(현 수원지법 성남지원 원로법관)에겐 “증인들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방창현(48)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현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도 통진당 지방의회의원의 행정소송 사건 재판장으로서 주심판사 몰래 법원행정처 입장을 반영해 판결문을 고친 혐의로 기소됐으나 재판부는 “재판장으로서 권한을 행사한 것”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외에 사법농단 사태의 핵심 피의자인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64)·고영한(66)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62) 법원행정처 차장 등 4명에 대해선 1심 재판이 계속 진행 중이다.
한편, 앞서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돼 기소된 고위 법관들에겐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유해용(55)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과 신광렬(56)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현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조의연(55)·성창호(49) 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현재 각각 대전지법 부장판사·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1·2심에서 잇따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임성근(57)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와 이태종(61) 전 서울서부지법원장(현 수원고법 부장판사)는 1심 무죄 판결에 이어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 경기신문 = 김기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