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다방 앞이었다. 다방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양희은의 노래가 걸어 내려왔다. 양희은의 노랫소리는 턴테이블에 감긴 LP판 눈금을 따라 천천히 풀어졌다. 다방 앞 횡단보도 역시 불어난 퇴근길 인파로 감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이 신문지를 깔고 앉아 술판을 벌였다. 새내기들은 선배들의 기타 반주에 맞춰 김광석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술잔이 부딪칠 때, 대학로의 젊음도 덩달아 참방거렸다.
권이 형은 붐비는 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리곤 불쑥 아무 이름이나 불렀다. 그것도 큰 소리로. “희숙아!”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으면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또 다른 이름을 불렀다. 역시 큰 소리로. “미경아!” 그렇게 아무나 부르는 여성의 이름에 누군가 뒤돌아보면, 비로소 권이 형이 움직였다. “이게 얼마만이냐. 오빠는 잘 있지?” 권이 형은 뒤돌아본 젊은 여성, 혹은 여성의 일행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권이 형은 처음 본 여성들을 이끌고 가까운 순대국밥 집으로 왔다. 외상장부를 적고 먹는 몇 안 되는 단골집이었다. 단골이라고 해 봐야 극단 소속의 배우들이 전부였지만, 인심 좋은 할매는 추가한 공깃밥을 따로 계산하지 않았다. 막걸리 잔을 돌리고 있던 우리 일행과 합석을 한 뒤에서야 여성들은 어찌된 상황인지 깨달았다. 열에 다섯은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찼다. 나머지 다섯 가운데 셋은 피씩 웃으며 일어났고, 둘은 깔깔 웃으며 함께 막걸리 잔을 비웠다.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 대학로 청춘들에게나 통용되는 치기어린 낭만이었으리라. 권이 형과의 첫 만남은 신춘문예 당선작품을 공연하면서였는데 내 작품의 주연 배우가 권이 형이었다. 지방에 살았던 나는 연습기간 내내 배우들의 집을 전전하였다. 특히 수유리 4.19탑 근처에 살던 종이 형 집에서 자주 신세를 졌다. 어머니는 종이 형과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렸다가 밥상을 내오셨다. 형과 나는 반찬을 안주 삼아 전날 남긴 소주병을 마저 비웠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벌써 삼십여 년째다. 흘러가버린 세월만큼 살아내는 터전은 멀어졌지만, 마음은 늘 곁에 있다. 열정과 고집으로 함께했던 그때 그 시절, 그 사람들... 형과 누이와 동생들... 언제 만나든 늘, 반갑고 감사하고 죄송하다. 여전히 무대를 지켜줘서, 연기자의 길을 걸어줘서, 암울한 현실에도 웃어줘서,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나를 용서해줘서,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그때나 지금이나 늘, 그 모습 그 생각 그대로여서.
한류가 뜨고 있다. K-POP과 K-DRAMA에 이어 K-MOVIE 열기 또한 뜨겁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일이지만 감춰진 속내를 생각하면 씁쓸하고 안타깝다. 이 땅에서는 민주주의만 피를 먹고 자란 것이 아니다. 한류 역시 가수와 배우와 스텝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 0.1%의 한류 신화를 위해 나머지 99.9%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어디서 보상 받아야 할까. 문화예술의 강대국으로 우뚝 섰다는 대한민국에서, 연극배우들의 평균 연봉은 1340만 원이다.
그럼에도 대학로의 배우들은 무대를 그리워한다.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