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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사람을 고친다. 구원한다.

⑩ 랜드 - 로빈 라이트

 

극심한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인 자해를 하게 한다. 고통이 심해지면 스스로 고립되고 은둔하려 한다. 당신들이 정말 내 고통을 알아? 내가 왜 이 고통을 당신들 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영화 ‘랜드’의 주인공 이디(로빈 라이트)가 딱 그런 심정이다. 그녀는 도심의 모든 일을 다 버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을 요량으로 (그녀는 일단 휴대폰을 길가 쓰레기통에 버린다.) 와이오밍의 산속 오두막을 매입해 거처를 옮긴다.

 

와이오밍하면 로키 산맥의 흉포(凶暴)한 자연을 생각하면 된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은 관광이라면 모를까 혼자서 생존해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곳이다. 샤이언 족 같은 인디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실제로 이곳엔 인디언의 후손들이 살아간다. 남한 면적의 2.5배 크기지만 인구는 58만 명에 불과한 곳이다.

 

이디는 사실, 그곳에 죽으러 간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고립돼있으면 서서히 죽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고통이 온전히 자신의 것만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위로하는 남들의 눈과 마음에서 다시 자신의 고통을 확인하는 것만큼 더욱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당연히 이디는, 처음엔 땔감 용 장작도 잘 패지 못한다.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도끼질은 아무나 막 하는 것이 아니다. 먹을 거라고는 도시에서 올 때 가지고 온 수백 개의 참치 캔 외에는 없다. 고기를 먹으려면 직접 사슴이나 토끼 사냥을 해야 하지만 드넓은 계곡 안에서 어디로 가야 할 지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이디의 오두막은 먹을 것을 찾아내려 온 회색곰의 습격을 받기까지 한다. 이디는 이제 슬슬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상황이 된다.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절대적 고립과 고독이라는 우리 안에 가둬 뒀음에도 불구하고 이디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얼마 전에 사랑하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린 아들을 잃은 듯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 특히 자식을 잃은 사람은 쉽게 그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동생 엠마는 이디에게 말했었다.

 

“제발 자신을 해치지 마. (Don’t hurt yourself)”

 

그녀는 동생의 그런 얘기가 귓등에도 들리지 않는다. 이디는 스스로 바란 대로 허기와 추위 끝에 이제 서서히 죽어 간다. 그런 그녀를 살리는 것은 와이오밍의 거친 자연의 흐름과 호흡을 잘 아는 남자 미겔(데미안 비쉬어)이다. 이디는 간신히 살아난다. 미겔은 그녀를 극진히 간호하고 보살핀다. 사냥을 하는 법, 사슴 가죽을 어떻게 벗기는지, 그 고기를 어떻게 보관하고 또 먹는지를 가르쳐 준다. 생존의 방식을 하나하나 배워 나가면 실제로 살아지게 된다. 이디는 미겔에게 묻는다.

 

“왜 나를 도와 줬나요?” 미겔이 답한다.

 

“내가 가는 길에 당신이 있었(을 뿐이)어요.”

 

 

주연인 로빈 라이트가 직접 감독까지 한 영화 ‘랜드’는 텍스트가 전혀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얘기이며 이들이 그걸 극복해 내는 이야기인데, 그러기까지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연대가 필요한 것인 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근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바로 그 지점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감정의 공유와 연대.

 

아무리 물질이 중요해진 사회이고 시대라 해도 결국 정신적인 것이 사람들을 지탱시킨다. 정신과 의지가 스스로를 지켜내게 한다. 나를 올바로 바라 보게 되고 내 스스로 고통을 이겨내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가 있다. 영화 ‘랜드’는 궁극적으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중반에 슬쩍 언급되지만 미겔 역시 아내와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은 것으로 보인다. 8년 전이라고 했다. 이디는 자신의 사연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고통을 나눌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고치고 치유시키는 건 자연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며 종교도 아니다. 그건 그냥 구체적인 또 한 명의 사람이다.

 

미겔은 이디에게 말한다.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디는 미겔에게 답한다. ‘맞아요. 그게 나죠. 당신이 주는 걸 받기만 하는 사람. 당신은 주고 난 받아요.’ 이런 얘기는 아주 진부하게 들릴 것이다. 마치 무슨 예수와 신자의 대화처럼 들릴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낡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충격적이다. 이 영화의 끝에는 실로 반전 아닌 반전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걸 꼭 보시기들 바란다.

 

그 결말까지 영화는 천천히 호흡하며 간다. 그 느린 호흡과 무서운 자연의 풍광이 압도하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인간의 삶이 정치와 경제를 벗어나 다른 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17일 개봉해서 3000명 남짓의 관객이 봤다. 한국사회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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