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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연천군,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중심지

일제 강점하 항일운동의 중심지 연천군 그 주역들 새롭게 조명

 

연천 항일의병 투쟁과 3.1운동

 

일제강점기 당시 연천군은 경성(서울) 외곽 항일운동의 주요 무대였고, 특히 항일 의병 중심지였다. 연천지역을 무대로 활약한 의병장과 의병 전투지 등은 손쉽게 문헌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고 지금도 의병의 활약상은 민간에도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연천지역 항일역사 유적과 인물을 살펴보면 심원사지 의병 주둔지 및 고랑포 전투지 등 항일유적이 23곳에 달한다. 공식적으로 정부 서훈으로 항일공훈을 인정받는 연천 출신 항일의병 및 독립유공자는 총 69명이다.

 

연천지역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특징

 

연천군은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약 70㎞ 떨어진 경기도 최북단에 있고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항일민족운동의 대표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후기 의병 때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활동했던 '허위(許蔿)'와 경기도 강화에서 의병을 일으킨 '연기우', 그리고 황해도 장단에서 기의(起義)한 '김수민' 등 우리나라 대표적 의병장들이 투쟁을 전개한 현장 중 하나가 바로 연천이었다.

 

즉, 연천지역 항일의병은 1907∼1910년간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펼쳐진 항일무력전인 '정미의병'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07년 8월 1일 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된 후기 의병 규합과 그 과정에서 연천이 경기북부 항일 무력전의 주요거점이었다.

 

연천 출신 의병인 왕회종·박종한·한창렬·전복규 등은 독자적으로 혹은 허위·연기우·김수민·김규식(金奎植) 등의 의진(義陣)에 참여해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그뿐만 아니라 연천지역에서는 1919년 3.1운동 때 백학면, 미산면, 왕징면, 남면, 중면, 북면, 관인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고, 이로 인해 순국하거나 옥고를 치렀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 무력항전 전개

 

연천 항일운동사에 있어 '허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허위 선생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전개했다. 선생 휘하에는 조인환, 왕회종, 김수민 등의 쟁쟁한 의병장들이 있어 각기 부대를 나눠 거느리고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연파했다. 의병부대들은 일본군 진지를 기습하고 전선을 끊어 통신을 마비시켰을뿐 아니라, 관공서 습격과 부일 매국분자 처단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 의병의 군량은 체계적으로 공급된 반면에 납세와 미곡 반출은 선생의 명령에 의해 중단됐다. 그러므로 선생이 활동하던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는 사실상 허위 선생을 총수로 하는 의병부대의 군정 아래 있었던 것이다.

 

허위선생은 1904년에 평리원서리재판장(오늘날 대법원장)을 지낸 인물로 당시 일제 침략에 대해 정부 관료 중에 그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선생이 주동이 돼 죽음을 무릅쓰고 배일통문과 의병항전을 촉구하고 조직적인 의병항전을 이끈 인물이다.

 

선생은 군율을 정해 민폐가 없도록 했고, 군비 조달 때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해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항일전에 큰 도움을 줬다. 한편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선생의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선생에게 해산을 종용해 왔으며 1908년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이처럼 의병투쟁과 3·1운동에서 차지하는 연천지역 위상이 결코 낮지 않기 때문에 연천군지, 경기도의 항일독립운동사 등에도 연천의 항일독립운동이 다뤄졌다. 이러한 기록들에 의해 연천 출신 의병이 소개됐고, 연천군의 만세운동과 3.1운동 참여자 등이 발굴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현장임이 밝혀지고 있다.

 

1908년과 1909년 연천지역에서는 김수민, 연기우, 전복규 등이 이끄는 의병투쟁이 지속됐고 일본군의 ‘토벌’로 쫓기는 상황이었지만 연천지역 의병들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투쟁했다.

 

연천의 독립운동가 새롭게 조명받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모진 고문과 폭력을 참아내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이 연천군의 노력에 의해 속속 새롭게 발굴되고 정부 포상과 서훈이 이뤄지고 있다.

 

이들 중 연천군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로는 소은명·소은숙 자매가 있다. 이 자매는 1920년 3월 1일 새벽, 당시 배화학당 재학생 신분으로 학교 뒷산인 필운대로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다가 종로경찰서 소속 헌병들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배화학당 학생들은 모두 24명으로 그 중 소은숙·소은명 자매도 포함돼 있었으며 실제 6개월간의 옥고도 치렀다. 시위 학생 중 소은명 지사는 당시 가장 어린 나이였으며 이 자매는 2018년 독립유공 공훈을 인정받아 자손들에게 정부 포상이 확정됐다.

 

연천군의 항일운동 인물 발굴은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의해 의병, 의열단, 임시정부 참여 인사 등 2021년 정부서훈이 확정된 인물만 11명에 이른다.

 

[ 경기신문 = 김항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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