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정조의 효심이 깃든 효원의 도시라는 걸 잊으면 안됩니다. 유네스코에서 아름다운 성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축성술이 예술의 극치로 우리나라 화성처럼 포근한 곳은 없어요.”
1973년 당시 이병희 제1무임소장관의 수원화성 성곽복원정화사업 종합계획을 수행한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을 만나 수원에 얽힌 추억과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성곽복원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들어봤다.
경기도 수원시가 고향인 1943년생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1968년 당시 정무담당 이병희 무임소장관의 비서관으로 특채돼 공직에 입직했다. 민선 1기 제1~2대 경기도 행정부지사를 지낸 그는 1997년 9월 대선 출마를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난 이인제 지사를 대신해 경기도지사 대행을 맡았다.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이병희 장관을 모시고 사무관으로 일할 때 수원화성복원사업 명을 받고 자료를 수집하고 계획서를 만들어 김종필 국무총리와 박정희 대통령 사인을 받았다. 그만큼 어려웠던 일을 함께 해냈다는 게 뿌듯하다”고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1973년 2월 당시 이병희 제1무임소장관은 일제 식민지 후 60년 넘게 방치돼온 ‘수원화성 성곽복원을 위한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1년 5개월만인 1974년 복원 사업은 시작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과정과 성공의 밑바탕에는 이병희 무임소장관실 실무팀의 완벽한 준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행정사무관을 지낸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이병희 장관께서 수원 출신 초임사무관인 내게 계획서를 만들라고 지시하셨다. 수원의 백봉 안익승 씨 등 여럿이 모여 직접 둘러보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원의 보물인 수원화성복원 사업 수명을 받고나서 가슴이 콩닥거리고 희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도 나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이병희 장관은 임수복 행정관에게 정조대왕의 효심이 가득한 수원화성에 대한 역사공부를 철저히 해 복원에 만전을 기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기록은 바로 역사’라는 뜻의 기이사속(記以史續)을 강조한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정조가 수원성을 축성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라며 “다른 나라의 성을 봐도 화성처럼 포근한 곳은 없더라. 수원은 정조의 효심이 깃든 효원의 도시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인터뷰하는 내내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고향인 수원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6·25 전쟁 이후 아버지의 고향 수원에서 피난생활을 했다는 그는 “곡반정동이 임씨 집성촌이었다. 우리는 교실도 없이 향교에서 추운 겨울에는 가마니를 깔고 앉아 어렵게 공부했다”며 “폭격 맞은 수원성곽이 남아났겠나. 오늘날의 수원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언론인 이창식 선생이 펴낸 ‘마당발정치인 이병희’ 작업을 도우며 그 역시 지난 추억을 되돌아봤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그는 “이병희 장관을 모셨기에 숨어있는 스토리가 많이 있지 않겠나. 사실을 기반으로 써야하니까 자료를 수집했는데 수원화성박물관의 조성우 학예사가 보내준 자료를 보다가 내가 기안한 ‘화산대효원종합계획 문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그런가 하면 책상 위에 놓인 자료집을 펼쳐 1998년 3월 발표한 ‘화성행궁 봉수당 준공식 축사’를 보여주기도 하고, 붓펜을 들어 ‘이존국법 이중민생(以尊國法 以重民生)’을 써내려가기도 했다.
수원화성이 실학사상의 발현지라 재차 언급한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무엇보다 다산 정약용이 ‘국법을 존엄하게 지키고 민생을 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 ‘이존국법 이중민생(以尊國法 以重民生)’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