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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둘

 

 

당신이 계신 곳은 어떠십니까. 제가 머무는 산기슭에는 비가 내립니다. 빗소리는 그윽합니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도 빗소리는 멀어지지 않습니다. 음악과 빗소리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안과 밖에서 차분합니다. 아침상을 물리고 길을 나섭니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산길을 걷습니다. 가려지는 것보다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습니다. 가리고 싶어도 끝내 가릴 수 없는 것들, 아랫배에 그어진 수술자국 같은 것들, 지금은 잊어버리고 없는 흑백사진 속 아버지의 눈물 같은 것들, 빗길을 걸어 숲에 들면 가려질 수 있을까요.

 

잣나무 숲길을 걷습니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걷습니다. 여전히 가려지는 것보다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숲길을 따라 양치식물이 군락을 이뤘습니다. 군데군데 산딸기가 익어갑니다. 숲에서 익어가는 산딸기는 달콤 쌉싸름합니다. 세상살이의 맛도 이러할까요. 어쩌면 나무(木)가 숲(林)을 이루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릅니다. 당신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삼림’(森林)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살림’이 떠오릅니다. 살림살이는 죽임이 아니라 살림입니다. 살림살이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생명 가득한 삼림처럼, 우리네 세상살이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일순이’와 함께 숲길을 걸었습니다. 일순이는 이웃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입니다. ‘키운다’라고 해서 도시에서 키우는 강아지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사료 대신 밥을 먹는 일순이는 목줄에 묶인 적이 없습니다. 똥도 오줌도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쌉니다. 제가 사는 집 마당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든 말든 일순이가 예쁜 것은 ‘개냥이’ 때문입니다. 개냥이는 일순이와 함께 자란 고양이인데 새끼를 낳다 죽었습니다. 그러자, 한 번도 새끼를 밴 적 없는 일순이의 젖이 불었습니다. 그리곤 죽은 개냥이를 대신해서 새끼 고양이들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일순이 닮은 강아지와 함께 늙어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시골살이 두 달 만에 저는 배운 게 참 많습니다. 하나같은 둘도 그렇습니다. 찬찬이 둘러보면 둘이 모여서 전혀 다른 하나가 되는 게 있습니다. 일순이와 개냥이가 종족의 틀을 깨고 가족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숲(林)을 이룬 나무(木)들도 그러하겠지요.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좋음’이란, 전혀 다른 사람 둘(好)이 만나면서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그리 어우러져 사는 것을 ‘호시절’이라고 한다지요. 좋음을 넘어, 옳고 마땅하고 아름다운 그런 세상살이 말입니다.

 

당신이 계신 곳은 어떠십니까. 제가 머무는 산기슭에는 비가 내립니다. 빗소리는 그윽합니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도 빗소리는 멀어지지 않습니다. 음악과 빗소리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안과 밖에서 차분합니다. 수평으로 눕는 음악 틈으로 수직으로 비가 파고듭니다.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지점이 당신과 제가 머무는 세상입니다. 하나와 둘을 애써 가를 필요는 없습니다. 둘이 모여 하나를 품고, 품은 하나 속에 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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