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7 (수)

  • 흐림동두천 ℃
  • 흐림강릉 30.0℃
  • 서울 26.2℃
  • 흐림대전 29.2℃
  • 흐림대구 31.6℃
  • 구름많음울산 29.0℃
  • 흐림광주 27.7℃
  • 흐림부산 26.7℃
  • 흐림고창 29.2℃
  • 흐림제주 33.1℃
  • 흐림강화 24.2℃
  • 흐림보은 28.6℃
  • 구름많음금산 29.3℃
  • 흐림강진군 29.3℃
  • 구름많음경주시 30.6℃
  • 구름많음거제 26.3℃
기상청 제공

[조헌정의 '오늘의 성찰'] 공동 운명과 개인 선택

 

나는 수용소에 내가 가든 다른 누가 가든 상관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흥분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체념의 미소를 지은 채 파멸의 품속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럴때 조차 궁극적으로 그들은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을 수 없음을 확실히 알기에 버틸 힘을 얻는다.

 

나는 결코 피학증 같은 것 때문에 수용소에 가려하거나 지난 몇 년간 내 경험의 기반이었던 소중한 것들에서 분리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일에서 내가 면제된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은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고 남에게 줄 것이 많기 때문에 숨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계속 말한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무엇을 주어야 한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 줄 수 있다는 걸 안다.

 

친구들과 함께 여기에 있듯 강제수용소에 있든 상관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순전히 교만일 뿐이다. 그리고 만일 신도 내가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나도 함께 겪은 후에도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또 내가 귀중한 인간인지 아닌지는 오직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내가 하는 행위에 의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어떻게 죽는가에 의해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가 밝혀질 것이다.

 

... 우리가 열린 창문 앞에서 최근의 추이에 대해 말할 때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고 생각했다. ‘오늘밤 우리는 서로의 품 안에서 흐느끼겠구나.’ 실제로 우리는 서로의 품 안에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다만 마지막 황홀경 속에서 그의 몸이 내 몸 위에 누웠을 때,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절망과 근본적인 인간의 슬픔이 밀물처럼 차올라 내가 그 속에 잠겼고,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 일어났다. ... 어둠 속이라서 그의 맨등에 얼굴을 묻고 몰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주위 강권에 못 이겨 유대인위원회 행정비서직 지원 후...) 나는 마치 배가 난파되어 끝없는 망망대해에 작은 판자 하나만 떠 있고, 자기가 살자고 다른 사람들은 바닷물 속으로 밀어내어 그들이 익사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바닷물 위에 떠서 하늘을 바라보고 누운 채로 잠시 흘러가다가 기도하면서 물속으로 가라앉는 걸 택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출처 : 《에티 힐레숨》 패트릭 우드하우스. 이창엽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에티 힐레숨 1914-1943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숨지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