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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17. 남한산성을 지키는 빗장 이배재

 

이배재는 광주시 목현동과 성남시 상대원동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옛날 한양과 삼남 지방을 이어주는 대로였고, 왕손들이 여주 세종과 효종왕릉에 참배하러 다니던 고개이고 무엇보다도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관방 요해처였다. 그런데 이 고개의 이름은 가장 널리 알려진 이배재를 비롯해 이배현(二拜峴, 李拜峴, 利背峴), 이보현(利甫峴, 理輔峴, 李父峴, 李甫峴), 이부현(利夫峴, 里鳧峴, 利阜峴, 利富峴, 梨府峴), 이현(梨峴), 이령(梨嶺), 이보치(利保峙), 이부치(利阜峙) 등 매우 다양하게 전해 온다.
 
먼저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고 하는 유래는 옛날 지방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갈 때 이 고개에서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해 다시 한 번 절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퇴계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해 절을 두 번 하고 길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황 관련 이야기는 이유원 문집 ‘임하필기’에 이배현(李拜峴)이라고 소개한 데서 유래한다.

 

 


이보치(利保峙)는 남한산성 방어에 매우 유리한 보장지라는 뜻이다. 일찌기 세종은 상왕(태종)과 함께 이보현(李甫峴) 주변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낮참에 광지원에서 머무른 후 저녁에는 벌내(伐川)에서 유숙하였다.
 
이배재는 1623년 봄 능양군(인조)을 앞세운 서인들의 쿠데타로 광해군(光海君)이 폐위되자 이이첨이 세 아들과 가족을 데리고 한강 정자에 이르러 목수의 초립(草笠)과 여우 껍질 남바위 솜옷으로 갈아입고 영남으로 달아나려고 이보현(利甫峴)을 넘어 각자 흩어져 엎드려 있다가 잡힌 곳이다.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광해군을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제거하고,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인조의 군사들에 체포된 이이첨은 참수형을 당했다.

 

 
그런데, 인조 집권에 군사를 동원해 결정적 역할을 한 이괄(李适)이 이듬해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켜 한양성을 점령함으로써 인조는 황급하게 공주까지 피난을 가게 됐다. 이괄의 반란은 하루 만에 실패하고, 이천으로 퇴각했으나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괄의 퇴각로 또한 이배재가 확실하다. 이괄의 난 핵심 참모인 윤인발은 역모가 탄로나자 이부치(利阜峙)에서 안개 속에 도둑을 만나 죽었다는 위장극을 벌이고 머리를 깎고 중으로 변장하여 반란에 참여했다. 이부현에 죽어 있는 사람의 낯가죽을 벗기고 윤인발의 옷을 입힌 후 그의 말 안장을 옆에 놓아두니, 윤인발의 집에서 통곡을 하며, 장례를 치르기까지 했다. 어쨌든 이괄의 난으로 반란이 두려워진 인조는 군사훈련을 감시하여 국방이 무력화됨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더구나 병자호란 때는 김신국, 정온 등이 400명의 군사로 먼저 이곳을 점거하여 삼남과의 연락망을 확보하자고 청했지만, 김류 등 군사 지식이 없는 고위층들이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적에게 빼앗겨 산성 안과 밖의 소식이 끊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군사적 중요성은 영조 때에 유수 이기진이 이현(梨峴)을 막고 나무를 가꿔 취암봉 위에 척후를 두고, 훈련 때 마다 복병을 보내고 남격대(南格臺)와 더불어 포화가 서로 응하게 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훗날 정조 임금도 1779년에 남한산성에 와서 이런 사실을 재확인하였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