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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이봐, 사랑보다 중요한 건 자유와 독립이야

㉖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 오키타 슈이치

 

일본 오키타 슈이치의 신작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중층의 텍스트이다. 여러가지의 얘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일단 일본의 초고령화 사회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여성주의가 겹쳐져 있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한국의 가족주의와는 철저히 다른 기조를 갖고 있는 일본의 개인주의가 지금 어떤 정점을 찍고 있는 가에 대한 사회적 고찰(考察)도 엿보인다. 그런 등등이 참으로 특이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모모코(다나카 유코)는 영화 내내 대사가 거의 없다. 일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에 딸이 왔을 때 잠깐 대화를 할 뿐, 일상에서 말을 나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나누는 대화는 거의 전부가 독백이다. 혼자서 마음 속으로 하는 얘기다. 입 밖으로 대사를 하지 않는 캐릭터가 극 전체를 주도하게끔 이야기가 구성돼 있다. 그것 참 별일이다.

 

모모코는 혼자 사는 늙은 여자다. 75세여서 사실 일본이나 우리의 현 고령화 사회를 생각할 때 아주 늙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아직 젊다. 때문에 모모코를 수식하는 말에서는 ‘혼자 사는’과 ‘여자’에 더 방점이 찍혀져야 한다.

 

 

모모코는 일본 북부 아키타 현 출신이다.(사투리가 심하다) 20대 초반, 부모의 중매결혼에 반발해 도쿄로 도망 나왔다.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녀는 같은 지역 출신의 노동자 슈조(히가시데 마사히로)에 반해 결혼한다. 아들과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남편은 일찍 죽고 아이들도 모두 분가했다. 그렇게 일찍 혼자가 됐다. 슬프고 외롭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모처럼만의 자유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많이 배우거나 삶의 경험이 녹녹한 것도 아니어서 그녀의 페미니즘은 비교적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녀는 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말한다. “결혼은 (집안에서 정해주는 사람하고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해!”, “(결혼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보다 자유와 독립이야!” 모모코는 어찌어찌 길을 돌아 오긴 했지만 나이 70대에 이르러 자유와 독립에 대한 자기 나름의 성취를 이룬다. 이제 그녀는 그녀 대로 혼자의 말년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여간 외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서는 일본의 ‘늙은이’들이 얼마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 고립의 무력감이 낱낱이 드러난다. 그게 참 처절하다. 고독한 비명의 메아리가 느껴진다. 늘 정갈하고, 줄 잘 맞추고, 자기 차례를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아는 (군국주의로 길러진) 국민성답게 일본의 노인들은 버스 정류장에서도 ‘가지런히’ 앉아 있다.

 

 

모모코가 가는 병원에는 늘 늙은이가, 아니 늙은이들로만 가득한데 소파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자기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모코의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1분 만나고 돌아왔다.” 그런 모모코의 일상은 일본 고령화 사회가 어쩔 수 없이 잉태하고 있는 일단(一旦)의 비극성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저러다가 다들 고독사를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모모코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한 남자의 환영을 보는데 그 남자, 항상 똑같은 말을 한다. “더 자. 일어나봐야 달라질 게 하나도 없는 날이야. 그냥 더 자.” 모모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모모코에게도 물론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비현실의, 상상속의, 정확하게 얘기하면 모모코 스스로가 만들어 낸, 모모코 자신의 분신(alter-ego)들이다. 마치 백설공주의 난장이 친구들 마냥 이들 세 명은 늘 모모코와 일상을 함께 한다. 그녀와 대화하고, 때론 그녀의 행동을 비웃고, 때로는 칭찬하며, 어떤 때는 재즈도 연주해 주고 춤도 같이 춰준다. 누군가 이들 세 명과 대화를 하거나 뭔가를 같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실성한 노친네 형국이다.

 

 

하지만 모모코나 이 세상의 수많은 노인들은 다들 그렇게 자신만의 친구를 두고 살아간다. 노인들이 종종 혼잣말을 하는 건, 어쩌면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 속에만, 혹은 기억 속에만 출입하는 친구들이 있는 까닭이다.

 

모모코가 이들 세 명의 분신과 노는 장면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는 느낌을 준다. 부드러운 성격의 여성 리어왕을 보는 것 같다.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그렇게 셰익스피어 식 정통 연극의 요소는 물론 가부키나 엔카 공연, 재즈 공연, TV 요소까지 마구 버무려 놓았는데, 그 형식의 자유로움이 매우 놀랍다.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연출 능력이 다층적인 곳에서 만들어졌고, 으레 연출은 그렇게 하이브리드하고 뮤턴트(돌연변이의)한 캐릭터여야 한다는 것, 그런 ‘괴짜 양식’이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일본식 개인주의가 일정한 경계를 넘어서면 그것이 페미니즘과 같은 사회적 ‘주의(主義)’와 연결되고 일맥상통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다. 모모코는 어찌 보면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자유와 독립, 여성으로서의 주체를 세우고 살아갈 수 있었던 셈이다.

 

일본의 여성들은 주체적이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아가기 때문에 주체적이 된다. 그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그 말 같지 않지만, 여기에는 뭔가 통하는 기류가 있다. 일본식 특수성이다. 특수는 때론 보편으로 이어진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와카타케 지사코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일본은 역시 이런 사(私)소설 격 영화에 기량이 높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특이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특수는 보편이고 보편은 특수이다. 일본의 한 노인 이야기인 척, 사실은 우리 자신의 얘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근 몇년 사이에 본 일본영화 중 최고다. 일본영화, 아직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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