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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진실을 알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㊱ 스틸워터 - 토마스 맥카시

 

자신 스스로를 덤애스(dum-ass), 곧 ‘촌뜨기 무지렁이’라 부르는 빌(맷 데이먼)은 새로 만난, 그리고 가까스로 가까워지게 된 버지니(카밀 코탄)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다.

 

그는 이국땅 낯선 곳,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노동 일을 하며 살아간다. 막노동판이다. 평생 그가 해왔던 일이다. 조금 더 나은 일이었다는 것이 석유 채굴 노동 정도였다.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했던 일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스틸워터라는 고장.

 

영화 ‘스틸워터’는 오클라호마 스틸워터 출신 노동자 빌이 프랑스에서 살인용의자로 투옥돼 살아가는 딸 아이를 구해내는 이야기이다…라기 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하며 그래서 (모두의 인생처럼) 지루한 이야기다. ‘스틸워터’는 파격적인 충격의 드라마가 아니다. 조용한 울림과 여운이 오래가는 작품이다. 극장 문을 나설 때 주인공 빌의 마지막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그렇지. 그렇게 되겠지라고 속으로 되뇌이게 만든다.

 

 

빌은 버지니가 홀로 키우는 딸 아이가 숙제를 하지 않자 자신도 어릴 때 공부하면 질색을 했다며 그래서 결국 땅 파는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러다 너도 나처럼 땅이나 파먹고 살게 될 거라고, 그는 어린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얘기 아닌 얘기를 한다. 빌은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고 할 때도 그래서 아예, 디깃!(dig it!)이라는 표현을 쓴다. ‘(땅 파서)밥 먹어’라는 뜻이겠다.

 

아무튼 빌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다. 아이의 엄마이자 여자 버지니는 지식인이다. 연극배우다. 자신이 평생 말도 붙여 볼 엄두를 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녀와 차츰 사랑에 빠진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깨닫게 된다. 딸 아이의 소중함을 배우게 된다.

 

사실 빌이 여기에 와있는 것은 자신의 딸 앨리슨(애비게일 브레슬린) 때문이다. 앨리슨은 살인죄로 마르세유에서 5년째 복역 중이다. 자신의 아랍계 룸메이트를 살해했다는 죄목이다. 앨리슨이 레즈비언이고 연인을 질투 끝에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앨리슨은 다른 아랍계 남자가 자신의 애인을 칼로 찔렀다고 항변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

 

 

아빠 빌은 그녀의 무고를 입증하려 애쓴다. 문제는 마르세유에서 유학 생활 끝에 이런 사고를 낸(당한) 앨리슨은 오히려 아빠가 무식하고 믿지 못할 인간이어서 일을 맡길만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딸 아이와 의절하다시피 하며 살아 온 빌은 마르세유에 딸을 면회하러 왔다가 프랑스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의 아이에게 진정한 부성(父性)을 느낀다. 대체 부성이자 의사(擬似) 부성일 수 있다. 하지만 빌은 생애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친딸 앨리슨을 둘러싼 범죄 행각이 그의 최초이자 최후의 행복한 일상의 발목을 잡는다. 인생 참, 쉽고 아름답게 풀리라는 법이 없는 법이다.

 

세상과 인생의 진실은 한 가지가 아니다. 두 가지이다. 아니 늘 여러 가지이다. 진실은 진실이 아닐 수가 있다.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 그건 어쩌면 실존적 선택의 문제이다. 그래서 삶은 복잡하고 다단하다. 진실이 여러 개라는 것은 어쩌면 모르는 게 낫다. 그걸 아는 순간 세상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이 ‘그 모든 것’의 진실을 알게 된 후 고향에 맞닥뜨려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석방된 딸 앨리슨이 여기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하자 빌은 “너무 많이 변했어. 내 눈엔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진실을 목도한 자, 바깥 풍경이 같을 수가 없다. 내 안이 변했기 때문이다. 모든 세상사는 어쩌면 유물적 존재의 관점이 아니라 유심의 관점, 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영화 ‘스틸워터’가 주는 기이한 교훈이자 삶의 방책이다.

 

 

‘스틸워터’를 쓰고, 만든 토마스 맥카시 감독은 다소 기이한 인물이다. 원래는 배우 출신이다. ‘미트 페어런츠3’같은 영화에 나왔다. 가족용 어드벤처 영화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은 대체로 널을 뛴다.

 

가장 획기적으로 보이는 것은 ‘스포트라이트’이다. 보스턴 글로브지 내의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를 다룬 내용이다. 탐사팀 스포트라이트는 미국 내 가톨릭 교구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 폭로했다. 이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특정 인물을 영웅시하기보다는 스포트라이트 팀 자체에 포커스를 둔, 그래서 매우 드라이하게 스토리를 전개시킨 것이 특징인 작품이었다. 또 그래서인지 다소 非할리우드 문법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2016년에 나왔을 때 그해 아카데미 각본상, 작품상을 탔다. 영국 아카데미,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등을 휩쓸었다. 거의 전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탔다. 그만큼 내용과 전개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셈이다.

 

이번 신작 ‘스틸워터’는 바로 그 ‘스포트라이트’의 뒤를 잇는 작품이다. 무겁고 착 가라앉아있다. 그만큼 차분하고 냉랭하다. 흥분하지 않는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동안 이상한 느낌으로 사람을 동결(凍結)시킨다. 현실의 비현실성이자 비현실의 현실성이다. 너무 놀라워서 그저 영화 얘기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지고 너무 극적임에도 현실에서는 실제 저런 일이 벌어진다는 자각 아닌 자각을 하게 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영화는 갑자기 불현듯 삶의 진실을 파고들게 만든다. 그걸 깨닫는 순간, 주인공 빌의 마지막 대사처럼 주위의 사물은 이제 예전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맷 데이먼의 연기가 한 마디로 ‘끝내준다’. 지적인 이미지의 맷 데이먼은 이번엔 막노동꾼으로 변신하기 위해 살을 찌우고 걷는 모양새를 바꾸고 말투를 바꾸고 등등, 그냥 아예 자신을 바꿨다. 연기자란 이런 것이라는 점을 역력히 증명해 낸다. 이 영화가 실제 인물인 아만다 녹스 사건을 극화한 만큼 현실과 드라마를 분리해 내고 그 간극을 캐릭터로 채워 내야 했을 것이다.

 

온전히 연기자에게 요구하는 몫이 적지 않았던 드라마이다. 배우가 갖는 질량, 그 깊이가 남다르지 않으면 영화의 기획과 촬영 자체가 진행되지 않았을 공산이 큰 작품이다. 맷 데이먼은 내년 아카데미 주연상 감이다.

 

세상의 진실이 여러가지더라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만큼은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포기하더라도 본인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과 사회는 다 잊는다 해도 사람의 내면은 진실탐사의 의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영화 ‘스틸워터’가 토마스 맥카시의 전작인 ‘스포트라이트’의 또 다른 연작처럼 보이는 이유다. 이건 또 다른 탐사보도 작품이다. 우리가 우리 내면을 배반한 것은 무엇인가. 배반의 실체는 무엇인가. 남을 속여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될 일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속이기 위해 자신부터 속인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스스로부터 알지 못하게 만든다. 요즘의 세상사에 대해, 위선과 거짓의 인간들에 대해 이 영화는 우회(迂廻)적으로 오히려 직시(直視)하게 만든다. 좋은 영화는 사회와 사람을 취조하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함께 동반(同伴)하려 한다. 이런 영화 요즘, 참으로 흔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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