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모든 학문의 시원이다. 서양에서는 지혜의 사랑(Philosophy)이었고, 동양에서는 넓게 배우고(博學) 깊이 묻는(審問) 것이었다. 그 대상은 인간과 우주를 포함한 세상만사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철학은 형이상학, 즉 관념론 부분만 남았다. 학자들은 철학의 역사를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의 역사로 정리한다. 물론 과학의 견지에서는 유물론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자연과학의 성과와 발견을 바탕으로 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발전시켰다. 엥겔스는 ‘자연은 변증법의 증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론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관념론은 이성의 사유와 통찰과 상상이다.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했다. 물론 이성적 사유의 결과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상대성이론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니 철학자는 관념적 사유의 결과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검증의 노력까지 해야 한다. 사실에 부합하는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주장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철학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19세기 산업사회 이후 수많은 분과학문들이 철학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 결과 철학은 형이상학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철학으로서의 자리와 역할이 있다. 분과학문들로 하여금 그 분야의 철학을 바로 세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조언을 하는 역할이다.
예를 들어 저널리즘 철학은 저널리즘에 한정한 공부로는 바로 서지 못한다. 저널리스트와 언론학자들 사이에 언론표현의 자유가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는데 철학이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저널리즘 철학은 실종 상태다. 경제학자인 이정전 교수는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은 수학적으로 생각하기 급급해서 철학적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라고 지적했다.
철학은 다시 종합학문으로서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철학자들이 19세기 이전의 철학으로 복귀해야 할 것이다. 수학자이면서 자연과학자였던 데카르트처럼 19세기까지는 모두 철학자였다. 뉴턴은 그가 개발한 미적분 방법을 이용해 우주의 법칙을 규명했다. 그의 대표 저서인 『프린키피아』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의 약칭이다. 정치경제학을 창시한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고, 마르크스의 박사논문은 헬레니즘 철학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슈뢰딩거는 물리학 공부를 하는 철학자라고도 했다.
인문학의 위기, 그 가운데서도 핵심인 철학의 위기는 그 자신에게 있다. 관념철학에 안주하면서 좁게 공부했기(薄學) 때문이다. 뉴턴을 닮은 자연철학자의 자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후퇴가 아니라 도약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다. 상상력의 힘을 불어넣으면서도 그것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새로운 풍토를 조성할 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