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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49 - 백령도 천주교 이야기(2)

부영발(傅永發) 신부의 백령도 지역사회 활동

 ‘Edward James Moffett’. 한국명 ‘부영발(傅永發)’ 신부는 백령도 현대사나 천주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혹자는 백령도에서 ‘공적비’라도 세워야 할 현대인 3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추천한다. 그가 천주교 선교를 목적으로 펼친 의료, 교육, 식량 및 의류 지원이 6⋅25 전쟁 이후 백령도 지역의 빈약한 경제 상황에 대한 주민의 요구와 맞아 지역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면에서는 백령도에서 종교의 외적 성장 기반을 마련한 계기가 됐는데, 그렇다면 부영발 신부와 백령도와의 인연, 그리고 백령도 지역주민을 위한 활동 내용은 무엇이 있을까? 아직도 백령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부 신부, 그가 한 일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과 인연 맺기

 

부영발 신부는 1922년 미국 뉴저지(New Jersey)의 뉴와크(Newark)에서 출생했다. 1941년 뉴와크의 대교구(大敎區) 내 달링턴 예비신학교에 입학했고, 1948년 사제(司祭)로서 서품을 받고 미국 Maryknoll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중국 광시성에 배치돼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약 3년 정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50년 중국 공산주의자(임표, 중국공산당 제4야전군)들에 의해 체포 투옥됐다. 중국 형무소에서 11회 이감, 36가지 죄목…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결국 ‘추방’이라는 감형을 받고 1956년 본국으로 추방됐다. 중국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으나 무신론자인 중국 공산당에는 통하지 않았기에 부 신부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그 후 백령도와의 인연은 1974년 미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한국의 현세적 상황과 백령도의 안보 위협, 당시 백령도 주민들의 실상을 가톨릭 사제의 양심으로 한 연설의 일부에서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1958년 한국으로 온 본인은 한국 서해에 위치한 백령도라는 섬에서 일해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섬은 북한해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자유 세계의 어느 항구나 어느 지역보다도 중공이 더 가까운 곳으로 약 30마일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에서, 그가 1958년 3월 한국에 파견 기회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 온 부 신부는 미 공군 오산기지 군종신부로 재직하다 당시 백령도 주둔 미 공군기지를 자주 왕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당시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를 만나 백령도를 함께 동행하면서 백령도와 첫 인연을 맺게 됐다.

 

이 때 백령도는 6⋅25 전쟁 이후 약 3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난민이 북한을 탈출, 정착했으며 초근목피의 삶을 이어가는 실정이었다.

 

당시 가톨릭 신자는 약 80명 정도였으며, 오랫 동안 사제가 없는 답동성당 백령공소로서의 교회를 유지해 왔으므로 부 신부는 백령도 천주교회를 처음 열고 본당으로 승격시키는 노력을 함으로써 1959년 5월 9일 인천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부터 백령도 성당을 설정받아 초대 주임신부로 인준됐고 그해 10월 1일 백령도 초임 주임신부로 정식 부임했다.

 

 ▶백령 사랑 실천을 위한 지역사회 의료 활동

 

부 신부 부임 시기의 백령도는 6⋅25 전쟁 이후 피난민과 낙도로서의 의료혜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시기로 초기 의료사업의 시작은 약국의 개설이었다. 미국원조 물품 중 의약품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피난민과 주민들의 전염병 예방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1961년 10월 1일 당시 백령면장(제8대 장흥옥)으로부터 부지(임야)를 양도받고, 1962년 11월 ‘김안드레아병원’ 허가를 받아 당시 우리나라 최신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을 세웠다. 당시 최고 수준의 종합병원 규모의 병원을 건립했다 하니 육지에서도 치료를 위해 입도했다고 한다.

 

결핵요양원은 김안드레아병원과 이웃했으며 규모는 8개 병실과 내부 성당, 기타 격실로 이뤄진 대단히 큰 규모였다. 또 부 신부는 부임 이후 대청·소청도 사목(司牧) 방문을 위해 15톤 규모의 흥련호(목선) 및 공영호, 그리고 대건호(철선, 50톤 규모)를 구입해 사용했다. 이 배는 단순한 종교적 목적 이외 인근 섬들의 환자 및 도로망의 취약지였던 두무진 공소 등의 환자 이송을 위해 병원선으로 이용됐다.

 ▶백령 사랑 실천을 위한 지역사회 교육 활동

 

백령도민의 교육을 위해 백령고등공민학교(가칭 성심중학교)를 운영했는데, 1963년 4월 12일 설립된 이 학교는 만성적 재정 부족을 겪던 중 부 신부가 1970년 경 전반적인 재정을 부담하며 이 학교를 인수해 운영하게 됐으나 1976년 2월경 폐교됐다.

 

또 본당 부설 유치원을 건립했는데, 1960년경 도서관 용도로 건축됐으나 유치원으로 변경해 사용됐다. 1960년 3월 2일 백령천주교회 부설 성모유치원으로 정식 명칭을 사용했으며, 1961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했다.

 

1973년경 부 신부가 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재정 지원의 중단 및 폐원이 이어지다가 제 8대 이덕진 주임신부에 의해 전 신자들의 모금과 후원으로 1984년 3월에 재개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외 여러 가지 활동이 있지만 부영발 신부는 1959년 5월부터 1973년 3월까지 14년 간 동양의 선교 여정 속에서 ‘배고픈 자에 음식을, 앓는 자에게 간호를, 집 잃은 자에게 안식처를’을 모토로 삼았고, 그 선상에서 백령 주민을 위한 다양한 의료 및 교육 활동을 전개하면서 신앙을 통한 복음을 전파했다.

 

그의 활동은 6·25 전쟁 후에 많은 피난민과 지역주민에게는 한 줄기 서광과도 같았다. 비록 백령도에서의 활동 이후 환속하면서 그가 했던 일의 무게감에 비해 쉽게 잊혀져 가고 있어 아쉽지만 향후 백령도 주민과 역사가 판단할 일이다. 부 신부의 활동 후 50여 년이 다가오며 선종(善終)한 지 25년 경과, 이제 부 신부의 업적을 가려내 백령도의 현대사에 기록해야 할 것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