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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서정시의 시대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아도르노는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떠올리면 아도르노의 절규는 상식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 줄기차게 서정시를 써왔다. 아도르노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통탄해했을까.

 

우리나라의 사정은 더할 것이다. 통계로 잡힌 건 없겠지만 생산되는 시 대부분이 서정시 부류에 속하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등식이 성립한다. 서정시는 인간과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문학 장르라는. 이 등식이 맞으면 아도르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그렇다. 서정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서정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아우슈비츠 등 인류의 숱한 학살을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명란 시인의 '아우슈비츠 이후'가 좋은 예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 서로를 갉아먹는 쇠와 쇠 사이의/ 녹 같은 연애를 했다/(부분)

 

그렇다면 서정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는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비극을 논하면서 서정시를 개인의 자기반성, 소설 등 서사문학을 집단의 자기반성 장르로 자리매김했는데 문학평론가들의 문학이론서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뜻하는지 풍부하게 와닿는다. 문학이 언어미학적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삶이 마주쳐 생성하는 내용도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서정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다 독자보다 시인들이 더 많아질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우리 시대를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일 게다. 개인이 중요한 시대에서 개인의 자기반성이 많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있을까?

 

일본의 경우 전통 서정시인 하이쿠 현역 시인이 인구의 10%에 육박한다는 통계가 있다. 국민 1천만 명이 시인인 것이다. 하이쿠는 5-7-5조 정형시로 계절을 환기하는 말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17세기에 바쇼가 예술성을 높인 이래 많은 개인들이 이 그릇에다 자기반성을 담아 즐기고 있다. 사회 비판적 하이쿠도 심심찮게 보인다.

 

우리의 경우 디카시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모바일 사진에다 짧은 시를 붙이는데 현대적인데다 자유시여서 디지털 시대의 개인에게 안성맞춤의 장르가 아닌가 한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 사전에 풀이돼 있는 설명을 들어보자.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디지털 시대의 문학 장르로 언어 예술이라는 기존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 예술이다."

 

서정시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개인의 문학'으로 지칭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이미 미학적 열정을 통한 개인의 자기반성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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