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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균의 재미있는 仁川 29 - 물이 짜지만 않았다면...

 물이 짜지만 않았다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가. 질문 자체가 엉뚱하겠지만 각양각색에 무한대의 생각을 하며 걷겠지만 좌, 우로 돌아보면 옛이야기나 역사의 한 축을 이룬 사건이 있지 않나 또는 문학의 풍광이 서린 작품이 있을까 생각하며 걷는 것, 이 맛이 진정 산책자들의 즐거움일 것이다.

매일 보고 걷는 길도 예외일 수 없겠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산책자들의 즐거움을 주는 야트막한 산(山)이 있다. 등산이라고 할 것은 없어도 아침이나 저녁, 아니면 휴일에 거닐어 볼 산 말이다.

 

인천의 진산, 계양산과 문학산을 우리는 많이 찾고 있다. 더군다나 문학산은 2015년 10월 15일 ‘인천 시민의 날’을 기점으로 개방돼 올려다만 보는 산이 아니라 발로 더듬어 오르는 산이 된 것이다.

1965년부터 10년이 넘게 미군 미사일 기지가 주둔했고, 그 후 1977년부터 40년 동안 한국 공군부대가 뒤를 이어 점유하면서 반 백년 간 올려다보는 산으로만 존재했었다.

 

계양산이 백운 이규보를 품고 홍명희의 ‘임꺽정’을 잉태시켰다면 문학산은 비류백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 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문학산이 아니고 남산(南山)이라고 기록돼 있는 바, ‘앞산’이란 의미를 부여코자 불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민초들이 부를 때는 ‘배꼽산’이라고 했는데 정상에 있는 봉수대가 꼭 누운 사람의 배꼽같이 보여 그리 불렸다는 것이다.

 

정녕 이름을 찾고자 했었으니 산세가 학의 날개 펼침과 같아 학(鶴)을 빌어쓰고 향교 문묘(文廟)의 문(文)을 차용, 문학산(文鶴山) 이라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다.

 

조선 시대 문필가 이병연(李秉淵)이 지은 사천시초(榹川詩抄)에서 문학산이라고 쓰인 것을 보면 오랜 명칭이다.

 

전자에서 언급된 문학산의 ‘비류백제’ 이야기는, 즉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주몽)의 곁을 떠나 동생 온조(溫祚)와 함께 남하 한 형 비류(沸流)가 미추홀(문학)에 정착해 살았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신하와 백성들을 온조의 위례(慰禮)에 귀속시키고 죽게 됐으며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문학산에 옛 비류, 미추홀 왕성(王城)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에분성(恚憤城)이 아닐 수 없다.

 

‘문학산등세로사(文鶴山登細路賖) 문학산 오솔길을 더디게 오르니, 미추증거설방가(彌鄒曾據說邦歌) 일찍이 미추가 나라를 세운 곳이네(이하 생략)’

 

이규상(李奎象 1727~1799), 호는 일몽(一夢)으로 목은 이색의 집안이며 아버지 이사질(思質)이 인천부사로 있었을 때(1765년) 인천 일대를 유람하며 18편의 죽지사를 지었는데 그의 문집 ‘일몽고’에 남긴 ‘문학산성’이라는 시조다.

 

인천도호부(현 문학초교)에서 문학산으로 오르며 쓴 회항의 시로 비류가 미추홀(문학)에 정착하지 못한 아쉬움이 서려 있다.

 

‘춘도편개망제화(春到偏開望帝花) 봄의 진달래는 한쪽에만 피었네(중략) 총사무주부신아(叢祠無主付神鴉) 주인 없는 사당은 신령스런 까마귀가 지키네(이하 생략)’

 

이규상이 바라본 비류의 터, 흔적을 더듬어 봄이 참으로 처연했는가 보다. 문학산성을 보고 ‘비늘 같은 석축들이 꾸짖는도다’ 하였음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한 비류왕의 독단을 실증해 반면교사를 얻고자 함이 넉넉히 남아 있는 마무리가 아닌가 한다.

 

미추홀(문학) 문학산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을까. 문학산성은 대중국 교역항이었던 ‘능허대’와 연결돼 있으며 해양방어 체계의 중심이 됐던 성이었을 성 싶고 부평의 계양산성, 서구의 허암산성, 노고산성 및 영종도 등과 함께 해양방어의 중심이 아니었을까.

 

‘물만 짜지 않았으면’ 비류의 선견지명은 일몽의 시를 낳지 않았을 것이며, 인천의 기념물 1호(문학산)는 무엇으로 정했을까. 문학산은 국보로 남으며./ 김학균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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