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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훈의 백령도 단상(斷想)/ 반 세기에 다시 떠올리는 고 최경림 면장

 반세기에 다시 떠올리는 고 최경림(崔京琳) 면장!

 한달 전, 북포리 여단 헬기장에서 바라본 백령 들판은 황금빛이었다. 과거 바다의 갯벌이 황금 들녘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 전부터다. 확 트인 너른 들판은 노란 색깔로 염색한 듯하고, 벼는 자연에 맡긴 듯 바람결에 유려한 자세로 춤춘다.

 

마치 매스게임을 보는 듯한 백령 들판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백령도의 별칭 ‘먹고 남는 섬’을 만든 최경림 3대 면장에 관한 얘기다.

 

그는 1945년 광복 이후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 동안 정치적 혼란과 격동의 시기에 오로지 백령도 발전을 위해 헌신한 참 면장이다. 1919년 출생했으며, 4남 4녀 중 장남으로 유년 시절은 부친이 배를 운영했기에 바닷가 용기포에 거주했다.

 

팍팍한 살림이었지만 근검을 토대로 10대 중반 이후 진촌 잿등으로 거처를 옮겨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백령도에는 마땅한 교육시설이 없었기에 백령초교보다 5년 먼저 개교(1932년)한 대청공립보통학교(현 대청초교 전신)를 다녔다.

 

졸업 후 19세 되던 해 백령면사무소 서기로 공직생활에 입문했고, 향토개발의 선구자가 되겠다는 큰 뜻을 품고 광복 이후 1946년 3대 면장에 취임했다. 28살이라는, 현재로선 상상할 수 없는 나이에 지역사회의 일꾼이었던 셈이다. 공정하고 공사가 분명하며, 근검이 체화된 성품으로 전체를 아우르며, 일을 추진하는 리더십과 예술적 감성이 뛰어난 성품이었다는 후문이다.

 

그는 향토교육 발전을 위해 1948년 11월 진촌리 공회당(현 백령리조텔 부근) 자리에 중학 과정의 백령고등공민학교(현 백령중고교 전신)를 설립했다. 3년제 고등공민학교는 백령도 전역에서 모인 학생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그야말로 없던 시절에 입신양명의 출발점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모두 6회까지 졸업생 202명이 배출됐으며, 1955년 신화동에 백령중학교 설립 인가 이후 1957년 3월 27일 자연 폐교됐다. 이외에 1950년을 전후해 서울 용산 청파동에 장익현, 이두일 등과 함께 ‘백령학사’를 마련해 백령 출신 서울 유학생을 지원하며 인재를 키우기도 했다.

 

민족의 수난기였던 6·25를 전후한 시기에는 반공 청년운동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1·4 후퇴 이후 운집해온 수 만의 피난민과 원주민의 민생고를 신속하게 해결했다. 그 중 대표적 사례가 피란민을 위한 정착지로서 ‘월내도촌’, 일명 ‘달동네’에 모여 살 수 있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것.

 

1946년 10월에서 1953년 4월에 이르기까지 약 6년 6개월의 면장직을 마친 뒤에는 동지를 규합해 1958년 4월 7일 장장 1050m에 이르는 제방을 축조하고, 신화동과 가을리에 해당하는 260정보의 제2정착지 농지 간척 공사를 착공해 1971년 준공을 보게 됐다.

 

삽과 지게로 돌과 흙을 나르며 개척해 지금의 황금 들녘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준공을 1년 앞둔 1970년 5월 타계했다.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현재 진촌리 동산에는 생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전 주민의 뜻에 따라 건립된 ‘靈岩崔京琳功績碑’가 있다. 원래는 가을리 간척지에 방치돼 있던 것을 1978년 유적재건위원회(회장 김순호)가 백령 도처의 각종 선정비를 이전 복원할 때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백령 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백령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고 최경림 면장, 지금은 그의 정신을 이어갈 새 리더가 필요한 시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김석훈·백령중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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