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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56 - 거타지설화와 심청 전설 깃든 연지동 이야기

 거타지 설화와 심청 전설의 신비감이 깃든 연지동(蓮池洞) 이야기

‘연꽃 연(蓮)’, ‘못 지(池)’ 즉, ‘연꽃이 피었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여 붙여진 연지동(蓮池洞)! 이 마을은 백령도 서쪽 끝에 있으며, 행정구역은 옹진군 백령면 연화1리, 2021년 1월 기준 145세대에 247명이 거주하고 있다.

 

중앙간선도로인 백령로를 따라 서쪽 끝에 다다르기 직전 도착하는 마을인데, 동쪽은 가골재를 사이에 두고 소가을리와 경계하며, 반대인 서쪽은 포구가 있었던 바다와 접한다. 바다 건너편으로 다다르는 육지가 중국 산동반도다. 남쪽은 연화2리인 중화동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쇠상이골을 넘어 두무진포구에 다다른다.

 

 ▶연지(蓮池)와 거타지(居陀知) 설화, 심청전 관련성

 

첫째, 연지(蓮池)와 거타지(居陀知) 설화 관련성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서 중 ‘삼국사기’와 쌍벽을 이루는 ‘삼국유사’에는 연지동 연지와 관련한 내용이 전하는데 권2 기이편 ‘진성여왕(통일신라, 887~897)과 거타지조’에 나온다. 일부를 소개하면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인 양패가 당나라 사신으로 갈 때 배가 곡도(현 백령도)에 도착해 풍랑을 만난다.

 

이 때 양패가 사람을 시켜 풍랑을 잠재울 제사처가 ‘신지(神池)’였음을 알게 된다. 제사 후 양패의 꿈속에 나타난 노인이 활 잘 쏘는 사람 1인을 남겨 둘 것을 요청하고, 마침내 50명의 궁사 중 제비뽑기를 통해 뽑힌 사람이 거타지였다…(중략)…노인의 소원을 들어준 거타지는 그 후 당나라까지 안전 항해를 했고, 귀국 후 노인의 딸이 부인이 되어 살았다”는 얘기다.

 

여기서 ‘신지’가 ‘연지(蓮池)’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인데, 세월이 흘러 1600년대 백령도로 유배를 왔던 이대기(李大期)는 연지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그의 책인 ‘백령도지’에 의하면 “백령도 서쪽 수십 리에 못이 있는데 크기가 호수 같고 둘레가 5∼6里(약 2.5㎞)이며 수목이 울창해…(중략)…거위, 고니, 오리 등 여러 종류의 백조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치는 별천지(別區)다”라 기록하고 있어 삼국유사에서 ‘神池’라 언급했던 곳이 위치와 정황, 그리고 신비감이 돋는 ‘蓮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연지(蓮池)와 심청전 관련성

 

‘인천광역시사’에 의하면 황해도 황주 도화동에 살던 심봉사의 외동딸 심청(沈淸)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중국 남경을 왕래하는 상인들에게 공양미(供養米) 300석에 팔려 인당수에 제물로 몸을 던졌는데, 그 갸륵한 효성에 대해 옥황상제가 특전을 베풀고 아름다운 한 송이 연꽃으로 변하게 해 이곳 연못으로 떠오르게 한 데서 연지가 됐다 한다.

 

▶그렇다면, 연지동 현지 주민이 생각하는 ‘연지’의 증언은 어떨까?

 

현재 연지동에는 연지가 없다. 모두 연지동 논뜰의 논으로 변했다. 연지동 아랫마을에 거주하는 김백순(87)씨는 연지동 연못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도로변 82○○공군부대 표지판 부근에서 연지동 논뜰을 가로질러 ○○○항공대로 향하는 직선 농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2개의 연못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윗 연못’, ‘아래 연못’으로 불렀는데, ‘윗 연못’은 연지동(아랫말)에 접해 있었으며 농로를 기준으로 우 측에 있었고 ‘아래 연못’은 좌 측에 있었다.

 

‘윗 연못’은 매우 컸다고 하며 매몰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도 농경을 하다 보면 연꽃씨나 토탄 등이 출토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연지’였음이 분명하며, 아울러 신지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아래 연못’은 ‘윗 연못’에 비해 낮은 지형으로 주변에 갯고랑이 있었고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요즘도 벼농사가 ‘윗 연못’ 주변의 논보다 잘 되지 않으며 지가(地價)도 낮은 편이라고 한다. 바닥에는 토탄의 양이 많아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며, 과거에는 토탄을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토탄이 자연스럽게 비료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윗 연못’ 보다 비료값이 저렴하게 들어간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토탄이 생길 조건은 해안가에 밀려온 유기물질이 퇴적돼 생기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토탄으로 생각되며, 아울러 ‘아래 연못’ 주변이 바닷가였음을 알려준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출입구, 포구는 사라지고 옹벽이 세워져

 

해안가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둥글납작한 자갈돌이 콩돌 해안과 유사하며, 폭염에 달궈진 자갈밭 위에 크고 작은 물고기가 서풍에 건조됐을 연지동 해안가와 포구 어업 모습들. 1950년 6·25 전쟁 이전에는 상어, 조기, 홍어, 까나리 등 조업 활동이 연중 성업을 이뤄 시간 가는 줄, 바지 주머니에 돈이 새는 줄 모를 정도의 활황을 이뤄 섬 전체의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최성용(81)씨는 이렇게 마을의 옛 영화와 자취를 돌아봤다.

 

1950년 전쟁 이틀 뒤인 6월 27일 북한군 400명은 백령도 침공을 위해 두무진이 아닌 이 포구로 상륙해 진촌(읍내)으로 침공했다. 두무진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은 망골재와 쇠상이골재의 고봉(高峰)을 넘기가 힘들었기 때문일까?

 

이후 9월 패주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살인의 만행을 저지르는 등 백령도 주민을 벌벌 떨게 했다. 연지동 포구가 북한군 침공의 출입구였던 셈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지동 포구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지금은 해안선과 나란히 시멘트 콘크리트 옹벽이 쳐졌다. 따라서 현재는 접근금지를 알리는 제방과 철조망 설치로 인적이 뜸해지면서 연지동 포구는 빛이 바랬고, 백령도에서 유일하게 포구가 없는 농촌 마을이 됐다. 그 대신 군 시설이 추가 설치됐고, 해안가로 나가는 쪽문만이 포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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