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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57 - 백령도 중심지에 위치한 북포리(北浦里) 이야기

 백령도 중심부에 위치한 북포리(北浦里). 간척사업 이전 어장과 염전이 있던 한적한 어촌이었지만 정착지 개간사업으로 농촌, 그 뒤 해병대 제6여단이 옮겨오면서 농업과 상업이 성업하는 백령도 제2의 도시로 변했다.

 

북포리가 백령도의 중심지임을 증명하는 기사가 1933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白翎島 公普 建築 位置問題’ 제목으로 실렸다. “백령도 공립보통학교(현 백령초등학교, 1937년 개교) 건립에 대해 진촌과 북포리 중 어디에 건립하느냐는 지역사회의 논쟁이 벌어졌고, 담당 기자는 학생 모집과 통학의 편의에 따라 중앙에 있는 북포리에 건립돼야 한다”는 내용인데, 1950년대 중·고등학교 건립 당시에도 똑같은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지금부터 90년 전 일제강점기, 학교 건립에 대한 장소 문제로 떠들썩했던 북포리의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북포리(1~3리), 2021년 1월 기준 3개 리에 1014세대 1593명이 거주하고 있어 진촌(7개 리, 2395명) 다음으로 큰 규모다.

▶지명유래와 명칭

 

앞서 언급했었지만 화동과 장촌부락을 합쳐 남포리라 했다면 반대로 간척 이전에 당후동과 신화동을 합해 ‘북포리’라 했으며, 그 시기나 연유는 ‘남포리’ 이야기를 참조하길 바란다.

 

북포1리는 대갈동과 접하고 있으며 ‘당뒷 마을’ 일명 ‘당후동(堂後洞)’이라 부른다. ‘당뒤’라는 지명은 본래 마을 앞쪽, 현재 북포보건지소 부근에 있던 마을 수호신인 서낭당이 남쪽을 향해 있었는데, 마을은 그 뒤쪽에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그만큼 서낭당이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의미하며 당시 서낭당, 당목(堂木)은 1951년 1·4후퇴 당시 평안도, 황해도의 피난민이 대거 몰려와 서낭당은 경작지, 당목은 반공유격대원들에 의해 벌목돼 땔감으로 사용됐다고 전한다.

 

벌목 과정에서 당후동과 대갈동 주민 간에 찬·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서낭당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북포보건지소 앞의 나지막한 당산(堂山)을 통해 상상할 뿐이다. 다만, 부정한 짓을 하면 서낭당 앞을 지날 때 발이 붙어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는 80대 어르신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편 해병 6여단 정문 앞의 도로 주변 상가 일대를 ‘신미동(新美洞)’이라 부르는데 1·4후퇴 후 미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미군 상대의 점포가 생겼고, 철수 후에는 피난민, 또 이후에는 6여단의 정착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미군 때문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 붙인 것이다.

 

북포2리는 백령도 최고봉인 ‘업죽산(해발 184m, 일명 松封山)’ 동남쪽 평지에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신화동(新化洞)이 있으며, 백령중고등학교가 있다. 신화동 지역의 원래 지명은 1802년 ‘백령도지’에 ‘수레넘이(車踰)’, 1910년경 ‘개머리(介也頭洞)’, 1913년에는 ‘신화동’으로 불렀다.

 

이후 개머리 주민은 현재 신화동으로 이주를 시키고, 현재 중·고교 서쪽 골짜기인 ‘감친골(甘親谷)’의 4가구까지 신화동으로 합친 것이다. 1913년은 마침 도장(島長)제에서 면장(面長)제로 바뀌고 면 아래에 리를 두었으며 리 안에 동을 두었으니 자연스레 당후동, 신화동과 같은 명칭이 지금도 자연스럽게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백령면의 초대 면장은 조상현씨(현 조희군 면장의 증조부)였으며, 자택에서 집무를 했다고 한다. 초기 백령도 천주교 전래에 큰 역할을 했던 분이다.

 

신화동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래 남포리 ‘화동’ 사람의 일부가 와서 살았기 때문에 ‘새로운 화동’이란 의미에서 신화동인지 새로운 마을이라 해 붙여진 이름인지 불명확하다. 그러나 한자의 구성, 화동 부락과 가까운 거리, 이동 주민 등 초창기 사정으로 보아 아마 전자의 예가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북포3리는 신미동 동쪽의 군부대 영외 거주자들의 거주지다. 이 지역은 주택지가 아니고 농지였는데 군부대 아파트를 건축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됐다.

▶공적비

 

여단 앞 좌측에 위치한 해병대 백령교회(1997, 일명 임마누엘교회) 부지 내 인적이 뜸한 곳에 공적비가 있다. 이 비석 하단부의 철판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띄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UN군 사령관 리차드 지 스틸웰 장군이 서해 5개 도서의 방어와 도서 주민들에게 베푼 봉사와 공헌은 우리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여기 장군을 기리고 존경하며 감사하기 위해 이 공적비를 세움. 1976년 10월. 해군도서방어부대 및 도서주민 일동.”

 

스틸웰 장군이 1973년 8월 1일부터 1976년 10월 8일까지 서해5도서를 위해 한 일은 무엇일까? 국방일보에 의하면 북한은 1972년 서해5도에 도발을 집중했다. 특히 스틱스(styx) 대함미사일을 탑재한 고속경비정까지 운용하며 아군을 위협했다.

 

당시 북한 함정은 북방한계선을 200회 이상 침범했고, 1973년 7월 27일에는 백령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 4척이 우리 어선 1척을 격침시켰었다. 우리 군은 공군 전투기와 해군 구축함까지 동원해 서해5도를 오가는 선박들을 엄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또 한 차례 민간인이 희생당하는 도발이 벌어진 것이다. 내용인 즉 “1974년 2월 15일, 백령도 근처 공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우리 홍어잡이 어선 1척(선원 12명)이 북한 고속정에 의해 격침되고 또 1척(선원 13명)은 납북된 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신 합창의장에게 방비책을 지시했고, 합장의장과 스틸웰 사령관은 백령도 방문을 통해 서해5도 사수작전을 세웠다. 그 조치 중 하나가 미국산 105㎜ M101곡사포를 모방 개발한 국산 105㎜ 곡사포 배치, 현역병도 M1 소총을 쓰던 시기에 백령도는 해병대는 물론 예비군까지 M16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또 대통령 지시에 의해 포병 화포가 아닌 퇴역한 탱크에서 떼어낸 90㎜ 탱크포(전차포) 등이 있는데,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의미있는 화기들이 휴전선 전방보다 먼저 배치됐다는 점이다. 그만큼 긴장감이 감돌며, 절박한 위기상태였음을 엿볼 수 있다.

 

국제적으로 1970년대는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고 데탕트(화해)를 부르짓던 시기로 긴장 완화와 화해, 협상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데탕트 체제는 미·소 강대국의 직접적 충돌은 없었지만 소련의 사주에 의한 대리전쟁이 지속됐다는 점이고, 한반도에서의 핵심지역이 서해5도였던 셈이다.

 

반세기가 지나 되돌아보면 자유와 평화 모두 소중한 가치이며, 경계를 마주하는 서해5도서는 어느 지역보다도 평화가 지속돼야 할 것이다. 그 역할의 중심은 북포리와 도서방위부대의 후신인 6여단이고, 1970년대 당시 백령중고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교련시간의 풍광을 잠시 생각해 본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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