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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60 - 백령도 행정.문화의 중심지, 진촌리 이야기

 진촌(鎭村)은 백령도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고려 현종 9년(1018) 백령진이 설치된 이래 현재까지 1000년 이상 진청터에 이어 면사무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근대 교육기관, 유서 깊은 종교 시설이 모여 있는 행정과 문화의 중심이다.

진촌을 ‘읍내’, 그리고 이외 지역을 ‘외4리’라 불렀던 이유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중심지 역할을 한 산물일 것이다. 또 중심지에서는 장시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있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외4리 지역에서 땔나무를 리어카와 달구지, 지게로 운반하거나 부녀자들이 이고 와서 물물교환(현 백령식품 일대)을 했다.

 

어디 이뿐이었을까? 관창주와 같은 지역 특산물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를 통해 매매됐을 것이다. 현재 진촌리는 1~7리까지 있지만 원래의 진촌은 두룡산 잿등을 중심으로 100고지(일명 북뫼 北山), 동산, 남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지형에 속하는 1, 2, 6리 마을이며 2021년 1월 현재 850세대 1520명이 거주하고 있다.

 

관계적 위치를 보면 진촌의 동쪽은 하늬해변이며, 밖으로는 옹진반도 서단의 마합도에 이른다. 서쪽은 두룡산 너머 진촌4리인 관창동이고, 남쪽은 남산(일명 안산)을 사이에 두고 진촌3리인 사곶이 위치한다. 북쪽은 약 12㎞ 지점에 인당수를 사이에 두고 황해도 장산곶이 있다.

 

▶ 진촌의 역사가 백령도의 역사

 

하늬해변가 진촌리(말등) 조개더미(패총)는 진촌 및 백령도의 오랜 역사를 반증한다.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기원전 1000년 당시 백령도 사람들의 생업 형태 및 생활 도구의 양상을 알려주며, 황해도 선사문화의 일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그런 이유로 옹진군 향토유적 2호로 지정된 바 있으나 훼손 및 방치되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러나 문헌에 의존한 역사시대는 진촌에 수군진이 설치되는 고려 초기다. 먼저 ‘진촌’의 유래는 ‘진(鎭)’과 ‘촌(村)’의 합성어로 강화도의 초지진과 같이 ‘진’은 성곽의 군사시설이고 ‘촌’은 마을을 의미한다. 성곽과 같은 군사시설이 있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백령도에서 군사시설인 ‘진’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진촌에 수군진이 설치된 것은 고려 초기이고, 우두머리인 진장(鎭將)을 둔 것이 현종 9년(1018)이니 약 1000년 전부터 진촌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도 ‘진’의 흔적으로 석심토축(石心土築)의 토성이 일부 남아 있다고 하며 ‘성안’, ‘동골몰’, ‘성밑에 동네’ 등 성곽과 관련된 지명이 있어 이런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고려 후기인 공민왕 6년(1351) 이후에는 왜구의 창궐로 섬을 비우는 쇄환 정책을 펴게 되면서 진장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내륙의 황해도 문화현(현 안악군 주변)으로 옮겼다. 이후 조선 초기 세종 10년(1431)과 광해군 원년(1609)에 진촌에 진을 설치해 조선 말기까지 백령진이 유지되었기에 진촌의 역사가 백령도의 역사가 된 것이다.

 

백령도는 우리나라 서해안 섬 지역에서의 전초기지로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진촌에는 진장이 수령을 겸한 직책을 갖고 통치하던 고읍(古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백령천주교회 일대라 추정되는 ‘진의 청사터’ 속칭 ‘구진지(旧鎭址)’나 이름만 전하는 ‘향교터’와 같은 건물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 향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향교터와 관련해서 고려 고종 7년(1220)에 백령진장으로 부임했던 이세화(?~1238)는 ‘진촌에 향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고 과거에 응시토록 해서 등용했다’고 한다. 특히 1620년 이대기는 ‘백령도지’에서 ‘본도가 별읍이 되어 지금도 향교동(鄕校洞)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향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다만 백령향교보다 100년 전쯤인 1127년에 건립됐다고 전하는 강화도 교동향교의 입지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고을(교동)의 진산인 화개산 남쪽 산록완사면 지형에 입지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 중심지였던 교동읍성에서 약간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만하다.

 

따라서 두 가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작은 성으로 둘러싸인 백령진 청사터가 백령천주교회 일대이기로 본다면 진촌의 진산으로 제사를 지냈던 100(m)고지(북뫼)의 산록완사면이면서 백령진에서 떨어져 위치한 백령초등학교 주변이 향교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혹시 향교터가 시대를 이어 전해져 현재의 백령초등학교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다만 건축의 주춧돌 등 부재는 교사 신축으로 인멸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백령도 지방관은 첨사(僉使)에서 도장(島長), 그리고 면장(面長)

 

백령도는 수군진이 있던 곳으로 고려 때부터 이어지던 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첨사(첨절제사)가 다스렸고 그 이후는 1914년까지 도장(島長), 1914년 이후 현재까지 면장(面長)이 통할하고 있다. 백령도에서 첨사 혹은 도장의 명단은 비석으로 남은 자료 이외는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시기에 역임했던 면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광복 이전에는 초대 면장 조상현을 비롯해 김윤항, 장동호, 조영훈, 이신항, 김정호, 함성항, 박준일, 방원 등 9명이 역임했고 광복 이후는 초대 면장 우태헌을 비롯해 함성항, 최경림, 김연흥, 장익현, 방원, 김종린, 장흥옥, 김종린, 최응상, 김종환, 최재연, 안현기, 나종원, 최필승, 이응규, 박형조, 김성일, 김두현, 조인수, 김예찬, 김정섭, 김대식, 김정섭, 이철, 김창원 등 26명이 거쳐갔고 현재 27대 조희군 면장이 재임 중이다. 참고로 광복 전후 혹은 광복 이후 각각 중임한 경우도 있다.

행정중심지인 청사 내지 사무소의 위치는 첨사제 행정 시절에는 진촌, 도장제 때는 진촌에 이어 가을리에서 업무를 보다가 면장제 행정으로 바뀌면서 초대 면장 조상현이 본가인 북포리 감친골에서 업무를 보다가 1913년 진촌리로 이전했다. 1921년경에는 면사무소 신축 문제로 진촌과 가을리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졌지만 황해도청에서 위치를 진촌으로 지정해 현재의 면사무소 자리로 정착하게 됐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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