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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64 - 1920~30년대 대청도 교육기관

 1990년대 영종대교나 인천대교가 건설되기 전 월미도에서 영종도행 ‘용주2호’를 타고, 교사·의사·운전사 등 삼사의 역량이 요구됐던 모 학교에 재직할 당시 현관에 걸렸던 ‘君子三樂’의 글귀가 생각난다.

 

이것은 초대 교장 선생님께서 현관문을 드나들던 모든 이에게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교육을 통해 교사의 역량을 갖추라는 시금석(試金石) 같은 가르침이었는데 20여 년이 지나 그 의미를 깨달으니 뒤늦은 자책과 평생교육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君子三樂’은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가르치는 것(得天下英才而敎育之)'이다. ‘교육(敎育)’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됐다고 하며 ‘가르칠 교(敎)’ 자는 ‘회초리로 아이를 배우게 한다’이며, ‘기를 육(育)’ 자는 ‘갓 태어난 아이를 기른다’는 뜻이다.

 

물론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열악한 도서지역 환경에서도 100년 전부터 영재로 육성하기 위한 열정을 갖춘 곳이 있으니 바로 접적 지역인 대청도다. 대청도의 교육은 백령도, 소청도를 포함한 인근 세 섬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다.

 

▶ 동내동에 처음 ‘대청사숙(大靑私塾)’이 만들어지기까지

 

백령도에 백령진이 설치돼 진장인 첨사가 다스렸던 시절이 있었듯이 대청도에도 군사적 중요성이 대두해 ‘대청진(大靑鎭)’이 설치됐다. 당시 대청진은 경기도 수원부 소속이었으며, 1799년(정조23)부터 1894년(갑오개혁 고종31)까지 96년 간 존재했다.

 

이 당시 진 운영을 위한 청사가 건립되지만 1894년 진이 폐지되고, 도장(島長)제가 운영되면서 종전의 진청사는 도청사로 사용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도장제가 면장(面長)제로 다시 바뀌면서 면 행정은 선진동으로 옮겨지고, 도청사는 빈집으로 남게 됐다.

진청사, 즉 도청사가 있었던 곳이 동내동(대청6리) 옛 보건소 자리인데, 지금은 경로당이 있다. 1921년 김학선(金學善, 당시 58세)은 몇 년째 빈집이었던 진청사 건물에 지금의 ‘공부방’과 비슷한 ‘대청사숙(私塾)’을 만들고, ‘숙장(塾長)’을 맡았으니 이것이 대청도 최초의 교육 시설인 것이다. 100년 전의 일이다.

 

교사는 안경춘씨와 몇 분이 계셨으며 학생, 그리고 교과목 등 세부 내용은 알 수 없다. 추후 밝혀지면 또 알려드리며 많은 정보가 있길 바랄 뿐이다.

 

▶ 동내동 대청사숙에서 ‘대청사립보통학교(大靑私立普通學校)’로 확대

 

그 후 김학선은 사재(私財)을 투자해 ‘대청사숙’을 확대하고 1923년 학교명도 ‘사립보통학교’로 전환해 교장을 맡았다. 1924년 3월 24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동네 청년들이 금주회를 조직하고 장학금을 모아 섬 내 사립대청(보통)학교에 전달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앞선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 1928년 8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를 요약하면 ‘대청도는 223가구에 천여 명이 사는데, 중심지인 배진포를 중심으로 도민들의 생활이 비교적 풍부하고 … 대청도는 6년제인 사립보통학교도 하나 있어 생도가 백여 명이라니 천 명 사는 섬으로 향학열도 상당합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대청도의 경제 중심지는 종전의 농업 중심인 내동에서 포경업 중심의 배진포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립보통학교가 6년제이며, 학생들을 위한 지역사회의 관심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학교가 동내동에서 선진동으로 옮겨갔는지 이동 여부는 알 수 없다.

 

마침 사립보통학교의 정황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어서 소개한다. 이 자료는 1997년 옹진군에서 의뢰해 작성된 ‘대청진 복원계획 조사보고서’에 수록돼 있다. 내동 거주 1915년생인 ‘문○’씨의 졸업증서인데, 2장이며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하나는 1930년에 ‘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졸업증서’로서 대청사립보통학교장 김학선이 인증하는 ‘제23호’ 졸업증서다. 이로 보아 대청사숙 시절부터 사립보통학교에 이르기까지 10년 간 적어도 23명이 졸업했음을 알 수 있고, 매년 2~3명이 졸업한 셈이다. 한자와 일본어로 구성돼 있다.

 

또 다른 졸업증서는 ‘문○’이 1930년에 입학해 소화8년(1933)에 대청공립보통학교장 사무취급 이연희(李然熙) 인증의 제1호 졸업증서다.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1930년에 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3년을 다녀 보통학교 졸업을 두번 하게 됐다고 한다

 

이 졸업증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입학은 1930년 사립보통학교였지만 1933년에 대청공립보통학교장 사무취급 이연희(李然熙) 인증의 1호 졸업증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청사립보통학교는 1932년 공립으로 전환된 다음 해인 1933년에 첫 졸업생이 배출됐고, 당시 교장이 미발령 상태에서 그 사무를 취급한 이연희 명의로 증서를 발급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양지동에 위치한 대청초등학교는 1932년 5월 1일에 개교한 것으로 돼 있어 이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당시의 공립보통학교의 위치가 선진동인지 답동인지 명확하지 않다. 공립보통학교로서 대청도는 백령도보다 5년 앞서 개교했으며, 이연희는 당시 보직이 ‘교감’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추가 정보를 기대해 본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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