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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사랑과 욕망, 그 종이 한 장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56. 나일 강의 죽음 - 케네스 브래너

 

워낙 유명했던 작품을 다시 만드는 것은, 게다가 그게 세계적 명작 수준의 원작소설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면 더욱 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어떻게 바꿀까’, ‘무엇을 바꿀까’다.

 

첫 번째는 결국 만드는 자의 차별성, 곧 자신만의 정체성 문제 같은 것이다. 마치 화가의 낙관(落款)같은 것을 자신의 영화엔 어떤 문양으로 찍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인데 이건 결국 시대정신과 관련이 있다. 지금의 시의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올바로 원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다.

 

두 번째, 무엇을 바꿀 것인가의 문제는 트렌드와 유행, 그 모던함을 어떻게 살려 낼 것인 가이다. 영화가 올드 패셔너블한가, 모던한가의 반응은 여기서 갈린다.

 

영국 셰익스피어 연극전문배우 출신의(그만큼 전통과 정통의 연기파라는 얘기를 듣는) 케네스 브래너는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나일 강의 죽음’을 두고 똑같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피터 유스티노프, 베티 데이비스, 미아 패로, 제인 버킷, 올리비아 핫세 등이 나왔던 1978년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 작품이었다. 너무 바꾸면 원작이 갖는 무게감, 그 의미를 실어내거나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시 또 똑같이 만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너무 ‘옛날풍’이기만 해서 ‘볼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나일 강의 죽음’은 엄청나게 돈이 많은 상속녀 리넷(갤 가돗)이 한때 친했던 친구 재클린(에마 매키)의 남자 사이먼(아미 해머)을 낚아채 결혼까지 하게 됐고 나일 강 유적지로 초호화 유람선을 빌려 신혼여행을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신혼부부는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 선박에 초대한다. 일단 대모(代母)와 그의 여비서가 있고,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의 줄임말)’과 그의 어머니(아네트 베닝), 신부의 전 남자친구이자 사실은 영국 공작 집안의 아들이고 의사인 남자, 그리고 이 신혼부부가 처음 만났던 클럽의 재즈 여가수와 그의 매니저 조카 등이다. 신부의 오랜 여비서도 있다. 나중에 이 여인도 살해당한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이 한 명 빠졌는데, 이미 유럽 상류사회에서 너무나 유명해진 벨기에 출신의 사립 탐정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가 이 선박에 탑승한다. 그가 배에 오른 이유는 신부의 남사친 부크(톰 베이트먼)가 초청해서인데 부크는 신부 리넷의 특별한 요청을 수행했을 뿐이다. 나중에 이 부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드러난다. 리넷과 사이먼 부부는 과거 사이먼의 여친 재클린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그리고 그 하소연은 결국 일련의 살인사건으로 비화되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놀라운 것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상속녀 리넷이게 이렇게 저렇게, 씨줄과 날줄로 원한 같은 것이 있었다는 점이다. 좋아하고 웃고 떠드는 것은 다 위장일 뿐이다. 물론 가식만은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빛과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밀실 안의 살인 사건은, 밀실 안의 사람들 중 한명이 범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건 어쩌면 쉬운 퍼즐 게임이다. 그러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원작이 늘 그렇듯이 이번 나일 강 살인사건의 범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 중에서 나온다.

 

 

케네스 브래너는 몇 가지 지점에서 어떻게 바꿀 것인가, 시대정신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있어 자기 식의 원칙을 지킨다. 젠더 문제와 인종 문제, 계급 문제를 원작과 다른 지점에서 녹여 낸 것인 바, 상속녀 리넷의 대모와 그녀의 비서를 사실은 오랜 동성 파트너 관계로 그려낸 점이 대표적이다.

 

극중 재즈 여가수 살로메(소피 오코네도)는 소설 원작과 1978년 영화의 3류 연애소설 작가 캐릭터를 바꾼 것이다. 1978년 영화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했던 올리비아 핫세가 오지랖 넓은 3류 작가 역을 맡았었다.

 

케네스 브래너는 살로메 이미지를 흑인 여가수로 바꿔냄으로써 영화의 인종 이슈를 슬쩍 뛰어 넘으려 한다. 살로메의 조카 로잘리도 리넷과 학교를 같이 다닌 인물이다. 로잘리는 당시 흑백갈등을 겪었고 그 문제로 리넷에게 앙심이 있다. 로잘리는 리넷의 남사친 부크와 비밀 연애에 빠진다. 당연히 돈이 많은 부크의 엄마는 그런 그녀를 못마땅해 한다. 계급 문제가 숨어있다. 케네스 브래너는 그런 식으로, 1937년 배경의 원작을 2022년의 시대상황으로 확장해 낸다.

 

무엇을 바꿔 내느냐에 있어서 케네스 브래너는 최근 공개된 영화 가운데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로케이션과 세트 미술을 보여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초호화 유람선의 실내는 놀랍게도 모두 세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1920~30년대 유럽 부르주아의 삶, 2차 대전 전후의 계급사회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화려했는가를 직접 목도할 수 있게 된다. 시샘을 넘어 부러움과 감탄의 마음이 되는 것을 어쩌지 못하게 한다. 케네스 브래너는 리넷이 소유한 티파니의 보석만큼이나 최절정의 사치스러움으로 영화를 치장해낸다. 영화에 나오는 보석은 실물이다.

 

람세스 유적지인 아부심벨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한 것도 감독 케네스 브래너의 야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나일 강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이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아부심벨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라고 하는 그의 ‘잰 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관객들에게 철저한 눈요기를 제공하는 셈이다. 영화 ‘나일 강의 죽음’에서는 기묘하게도 영화가 가장 영화다울 때, 곧 TV드라마나 연극 무대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때, 그 존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절박함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에르큘 포와로는 왜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기르는 것일까. 보통은 쿠키 영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케네스 브래너는 이번 영화에서 과감하게 맨 앞에 배치했다. 포와로는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지극히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 포와로의 개인사를 보여 준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결국 사랑이 문제다. 사랑 때문에 모든 파탄이 빚어진다. 근데 그건 사실 사랑이 아니다. 사랑보다는 욕망이고, 욕망보다는 탐욕이다. 모든 배신과 살인이 벌어지는 이유다. 사랑과 탐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세상사, 인생사 모두 그 경계를 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유람선 갑판에 있을 때 카메라가 패닝(panning)을 하며 한 명, 한 명을 보여 준다. 영화에서 패닝신이 자주 등장한다. 그 안에 범인이 있다. 범인을 잡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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