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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포기할 수 없어요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을 보세요. 낳고 기른 딸이,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걸어가요. 낮게 걸린 비구름 사이로, 건듯 내딛는 걸음걸이가 바람 같아요. 바람은 멈추지 않아요. 멈춤과 바람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서, 끝끝내 멈춤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요.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이 그래요.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딸이기를 포기한 적은 없어요. 의사의 입에서 사망선고가 떨어지던 그 날도 그랬어요. 모두가 절망으로 머리를 조아릴 때, 당신이 낳은 딸은 바람처럼 나부끼며 온몸을 펄럭거렸어요.

 

- 울 엄마 아직 안 죽었어요.

 

엄마, 당신이 기른 딸을 보세요. 낳고 길러 공부시킨 딸이,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새벽을 열어요. 새벽이면 어둠은 썰물처럼 무너져요. 무너지는 어둠을 딛고 현관문을 나서는 뒷모습이 밀물 같아요. 밀물은 바다를 품었어요. 바다를 품은 밀물이 첫차를 타고 돈 벌러 가요. 엄마, 당신이 기른 딸이 그래요. 가족을 먹이는 일이라면 포기하지 않아요. 포기를 모르는 모습이 엄마를 닮았어요. 뒷모습조차 당신이랑 똑같아요. 금방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고 서방” 하고 부를 것 같아요. 불러 세우곤 또 이렇게 도란도란 읊조리겠지요.

 

- 걱정말소. 기 펴고 사는 날 올 것이네.

 

엄마, 당신을 닮은 딸을 보세요. 바다를 들쳐 업고 갯벌을 파먹이던 딸이,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하루를 열어가요. 정해진 길 없는 시간 속에서, 희망을 찾는 눈이 까만 숯 같아요. 숯은 포기하지 않아요. 완전히 태워짐으로 거듭나는 것이 숯이라서, 말갛게 피는 불씨로 시커먼 몸뚱이를 다시 태워요.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이 그래요. 당신의 외손녀가 코로나로 온 몸이 펄펄 끓을 때도 그랬어요. 환자가 젊다는 이유로 응급실 문턱조차 밟을 수 없던 날, 당신이 낳은 딸도 숯불 되어 함께 타올랐어요. 까만 밤을 하얗게 태우며 재가 되어 부서졌어요.

 

- 오메, 이러다 내 딸 죽이겠네.

 

엄마, 당신이 기른 딸을 보세요. 시집살이 들쳐 매고 눈물밥 떠먹이던 딸이,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살림을 해요.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손끝이 갈퀴나무 옭아맨 빗자루 같아요. 빗자루는 포기하지 않아요. 버려진 것들을 쓸어 담고 외로운 것들을 끌어안아요.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이 그래요. 딸이라 이름 붙여진 모든 여성들 역시 그래요. 빗자루는 늘 구석으로 밀려나지만, 밀려난 빗자루가 그늘진 세상을 비우고 생명의 씨앗을 심어요. 겨울을 쓸어내고 봄을 뿌려요. 절망을 치우고 희망을 세워요. 죽음을 끌어안고 생명을 잉태해요.

 

-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여성’과 ‘가족’은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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