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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 (난독일기)] 비 오는 날의 주문(呪文)

 

 

할머니가 앉았다. 시장 입구다. 기다란 우산에 비닐을 씌워 비를 피한다. 생김새만 보아서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천막 같다. 생김새만 닮았을 뿐, 저렇게 작은 천막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쪼그리고 앉은 라면 박스 위로 비가 들친다. 할머니 발치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에도 비는 어김없다. 상추랑 쑥갓은 이천 원이고 고추는 천오백 원이다. 파란 바구니가 상추랑 쑥갓이고 빨간 바구니는 고추다. 빨간 바구니는 파란 바구니보다 작다. 할머니의 굽은 어깨도 비닐을 씌운 우산보다 작다. 우산을 씌운 비닐을 타고 빗물이 줄줄 흐른다. 비닐 안쪽은 할머니의 입김으로 뿌옇다. 비 오는 날의 하루가 뿌옇다.

 

할머니 앞에 아주머니가 앉는다. 두부가게 아주머니다. 기다란 우산에 비닐을 씌워 비를 피하는 할머니에게 콩물을 건넨다. 콩물 담은 바가지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으짤라고. 오늘 같은 날은 나오지 말고 쉬어야제. 말은 억세도 눈빛은 살갑다. 아주머니는, 손사래 치는 할머니 비닐 천막 안으로 콩물 바가지를 밀어 넣고 돌아선다. 한참을 꿈쩍도 하지 않던 할머니가 콩물 바가지를 집어 든다. 한 모금이나 마셨을까. 할머니는 빈 페트병에 콩물을 부어 담는다. 페트병 두 개에 콩물이 가득 찬다. 가득 채워진 콩물을 할머니는 누구에게 먹이려는 걸까. 따끈한 콩물의 온기로 비닐 안쪽이 뿌옇다. 비 오는 날의 하루가 뿌옇다.

 

할머니가 걸어온다. 수술실 앞이다. 침대에 누운 할아버지 손을 꼭 쥐고 할머니가 걸어온다. 뭔 겁이 그리 많소. 쬐끄만 혹 하나 띠어내는디. 할머니 너스레에 침대에 누운 할아버지가 맥없이 웃는다. 할머니도 따라서 웃는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마주잡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이 스르륵 풀린다. 할아버지를 실은 침대가 수술실 문 너머로 사라진다. 그제야 할머니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오메, 불쌍한 우리 영감 으짜까. 주저앉았던 할머니가 가슴을 친다. 동동거리는 발 때문에 신고 있던 슬리퍼가 벗겨진다. 벗겨지든 말든 할머니의 눈물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콧등에 걸린 돋보기안경이 뿌옇다. 비 오는 날의 하루가 뿌옇다.

 

할머니 앞에 간호사가 앉는다. 할아버지 병동 간호사다. 주저앉아 우는 할머니에게 간호사가 휴지를 내민다. 할머니의 눈물바람은 간호사를 붙들고 계속된다. 할머니 가방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기에 대고 쏟아내는 할머니의 호통이 가파르다. 오살할 놈들, 지금 회사가 문제냐. 돈 벌어다가 느그 아부지 송장 치우는데 쓸 것이냐. 달래던 간호사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비 오는 날의 하루가 뿌옇다. 시장 입구가 아니어도 좋고, 수술실 앞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같이 장대비 쏟아지는 날이면, 그늘진 세상에 뿌리박고 사는 들꽃을 위해 주문을 외우자. 삼백예순날, 설움만 삼키며 사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주문을 외우자.

 

-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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