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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이상룡과 그의 아들

 

 

올해 8월에도 일본 총리는 전범들의 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도 희생된 개인과 이웃 나라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

 

나는 8월을 보내며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상룡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이준형이다. 이제는, 안동 권문세가의 장자이자 지주였던 이상룡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제법 많아졌다.

 

이상룡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가산을 처분한 다음 집안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회영 형제와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도 그였고, ‘항일무장투쟁’을 네 번째 차례에 놓으려는 상해 임시정부의 강령을 첫 번째로 바꾸도록 한 것도 그였으며, 서로군정서를 조직한 것도 그였다.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번화한 도시 상해로 나가기를 거부한 채 노구를 이끌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서간도에서 항일무장 투쟁의 최전선을 지켰던 이상룡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젊은 투사들을 먼저 걱정하고 챙겼던 그는 누구보다 아끼고 믿었던 젊은 동지 오동진과 김도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이상룡은 그와 더불어 싸워온 젊은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공로도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쓰러져,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부디 여러분은 외세 앞에 스스로 힘을 잃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이 늙은이 죽을 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게. 우리가 귀중하게 여길 것은 성실성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라를 되찾기 전까지는 자신을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 이상룡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이준형은 그의 아들인 동시에 그의 참모였으며 동지였다. 그의 유언대로 아버지를 서간도의 가묘에 묻은 이준형은 아버지의 유골 대신 아버지가 남긴 유고를 안고 귀국했다. 이준형이 아버지의 피와 혼이 담긴 글을 정리하는 동안 일제는 끊임없이 변절과 배반을 강요했다. 반복되는 체포와 구금, 고문을 견디며 아버지 석주 이상룡의 문집 정리를 마친 다음 이준형은 스스로 목의 동맥을 끊었다. 67세 생일에 그는 그렇게 일제의 강요를 영원히 거부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

 

아들 이준형이 남긴 가슴 아픈 유서였다. 이런 아버지와 아들들이 지켜낸 도저한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일본의 가혹한 압제 속에서 많은 사람이 조국을 배반하고, 심지어는 밀정이 되어 동지를 일제에 팔아넘겼다. 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아들과 딸이 그 아버지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나란히 무릎 꿇고 사죄하기도 했다. 안중근의 결의 형제였던 엄인섭은 일제의 밀정이 되어 철혈광복단 단원들을 사형대에 세우기도 했다.

 

8월을 보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일본과 조국을 배반하고 그들에게 협력하고, 밀정이 되었던 자들과 함께 이상룡과 그의 아들 이준형의 장엄했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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