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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68.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 원균(元均) 장군

 

 

임진왜란은 1592년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돼 1598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크게 임진년과 정유년 두 차례로 나뉘어진다.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내륙이 왜군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다행스럽게도 이순신과 원균 등 수군의 활약으로 왜군은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원균(元均, 1540~1597)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장수 중 한 사람이다. 28세 때인 1567년 무과에 합격하여 거제현령과 조산만호를 거쳐 47세 때 종성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1월 경흥에 침입한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1592년 3월(52세)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지 약 2개월 만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5월 7일 옥포, 합포해전에서 승전한 후 적진포, 사천, 거제 당포, 당항포, 율포, 거제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부산포 해전 등 임진년 한 해 동안 여러 곳에서 승전하였다.

 

 

1595년 12월 충청병사로 청주의 상당산성을 수축할 때는 토굴에서 생활하면서 고생을 함께 하였고, 1596년 전라병사, 1597년 1월 28일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 수군통제사,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전사하기 전까지 왜선을 격파한 것이 130여 척에 이르고, 적을 베인 것이 수백이요, 물에 빠져 죽은 왜군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충신(忠臣)이란 적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으면 승패를 따지지 않고 충신이라 한다. 백제의 계백(階伯) 장군도 그러하고 임진왜란에서 패한 신립(申砬) 장군도 탄금대에서 전사하였으며,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의 700 의병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고, 그 밖에도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장수와 의병들을 충신으로 기린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성남 출신의 남유(南瑜) 나주목사도 충신이며, 병자호란 삼학사처럼 무기없이 죽은 사람도 충신으로 섬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원균 장군만은 그 공적이 폄하되고 심지어 비하와 모욕의 대상이 되어왔다. 반드시 역사적 판단을 바르게 하여 장군의 공적을 재평가 해야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공적을 평가하여 원균, 이순신, 권율 장군을 선무공신 1등으로 책록하고 임금은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조선 수군이 패한 칠천량 해전을 살펴보면, 왜군 소서행장은 가등청정과의 갈등으로 가또오의 출정을 조선의 김응서에게 알리고 김응서는 조정에 보고하여 이순신으로 하여금 즉각 출동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순신은 작전상 불리한 요건을 감안하여 즉각 출동하지 않음으로써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원균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원균 또한 이 작전이 불리한 정황을 알고 있었는데, 7월 11일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면서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부득이 진군한 원균은 7월 16일 패전하여 전사하였다.
 


원균은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4마리를 먹었다. 체구가 건장하고 비대하여 몸이 무거웠지만 충직한 군인정신의 소유자였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를 모아서 의론하기를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 하였다. 배설(裴楔)이 팔을 걷어 붙이며 큰소리로 반대하여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이오"라고 말하고는 12척의 배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이 12척의 배가 이순신의 수군 재건에 기여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